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난 해 6월에 글을 올린 이후 접속을 못했습니다. 다음과 카카오 계정을 통합하는 와중에 제 계정은 통합에 실패했고 메일은 다음 구 계정으로 접속해야 하는 와중에 새로운 일로 정신이 없었고, 또 문의를 넣었는데 갔는지 안갔는지, 답변이 왔는지 모를 상황이라 혼자 앓다가 오늘에야 해결했네요. 간단합니다. 카카오 계정으로 접속하면 되는군요. 이 계정에 들어와서 한 일이 이 카테고리에 있던 글을 비공으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책이 나왔거든요. 2019년 초반에 나왔어야할 단해온이 이제야 나왔습니다. 아예 폐기할까 하다가 다음 작업을 위해 길은 터야할 것 같아서(그래도 책이 있는 냔이 원고를 가져가는 게 좀 낫습니다. -_-;;;) 구매할 수 있는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워낙 듣보잡의 책이라 대부분의 오프라인..
아주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폈습니다.(물론 전혀 안 들쳐본 건 아닙니다. 이 블로그 글을 위해 펴든 것이 매우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말이죠) 이 대목을 꺼내 든 것은 마침 "후한서 동이열전 연구"라는 책을 보기 위해 가평의 도서관까지 갔다가(삭주에는 없습니다) 마침 이 대목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이 첫째요. 마침 "남만 탐미다례 천년사"의 일로 시끄러운 형국이라 그렇습니다. 원문 二年春, 遣將襲漢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번역 2년 봄, 장수를 보내어 한의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케 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덕과 신의로 대하니 이에 다시 화친하였다 -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2, 모본왕 2년조 일단, 눈에 들어오는 지역의 위치는 이렇습니다. 지금의 북경의 ..
글쎄요. 그런 점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우리나라 근대사학이라면 일제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여져서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이른바 실증사학이라는 학풍이 사학연구의 기조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사학의 성립이랄가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과정이고 필연의 추세였다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엄밀한 사료의 비판을 통해서 정확한 고증을 거쳐 ‘과거의 사실을 사실대로 밝힌다’는 그러한 견지에 서는 것이 역사학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역사해석이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테두리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 권선징악적인 견지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있었던 것입 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미 ‘크로체’이후로..
몇 달째 가와다 준조의 "무문자사회의 역사"를 읽고 읶는지 모른다. 올해 초의 석달하고 반에서 한달 반 가량은 일을 하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고, 두 달 동안은 마치 1차대전 참호전과 같았다. 이 책말고도 읽어야 할 것도 많았지만, 이 책이 한 문장, 한 문장이 그냥 스쳐지나갈 수는 없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매우 천천히 음미할 책을 골랐달까. 문제는 올해안에 마치기로 한 작업에 이 책이 매우 중요한 지도서라는 것. 본디 대외관계에서교역을 전쟁보다도 아래로 보았고, 이제는 외교행위보다도 한참 떨어지는 중요도라고 본다. 알려지면 곤란하지만, 한국고대사에서 교역이 가지는 중요성을 매우 낮게본다는 말이다. 물론 청동기~초기철기, 거기에 낙랑을 더한 초기교역과 7~10세기 황해, 또는 동아지중해 교역의 ..
페북에는 마침, 강감찬이나 이순신을 꽤나 오랜기간 다루는 페친들이 있다. 그 분들 정도는 아시겠지만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요즘으로 치면 군단장에게 ~~소령이라 부르는 식. 강감찬은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까지 지낸 사람이고, 애초에 문과급제자다.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인 문벌귀족과 조선의 양반이 뭐가 다르냐 다같은 귀족이 아니냐고 하는데, 이는 한국사람보고 중국인이라고 하거나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기술관료적 성격도 강하게 가지는 조선 문관(동반)과 달리 고려 시대 귀족은, 그것도 초기쪽으록 가면 전란기 호족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애초에 강감찬은 한강 이남 최대 호족) 한 지역의 왕초고, 또 국가의 거물이니 당연히 힘쓸 줄도 알아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