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삼국사기 자체를 궁구하는 이는 매우 적은 게 현실이다만, 그 소수조차도 간과하는 게 있다. 지금 삼국사기가 완질로 남아있음이 매우 신기한 상황이란 거다. 그니까 20년대를 기준으로 조선 초, 경상도에서 판각한 3차 판각본의 일부만 남아있는 게 정상이다. 북송 이전 중국정사의 사례들처럼 여러 종의 사서가 최종 본 하나 나오면 다 사라지는 게 보통이다. 후한서도 20여종 가까이 남았지만 현재 범엽의 기전체, 원굉의 편년체 후한기 둘만 남아있다. 진서도 두자리수 넘게 있었지만 당태종 시절에 나온 것 하나만 남았다. 위서도 현존하는 건 위수와 위담(위수의 조카인데 당초에 개정판을 냈다)의 것을 스/깠/다. 구오대사인가 하나는 나중에 여러 책을 뒤져서 인용된 것을 추려 복원한 거다.누가 태운 것도 아니다. 안팔리..
삼국사기는 완성 직후부터 여러 차례 인쇄되었습니다. 과거의 책이라는 게, 요즘처럼 한방에 수백 부, 수천 부를 찍어 내놓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보관되다가 없으면 또 찍거나, 그냥 필사해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몇 번 말했지만 과거의 책은 특정 전쟁으로 불타는 것보다 일상적인 화재, 수해, 관리소홀 등으로 없어지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그저 전쟁 한 번에 타오르는 장면이 워낙 압도적이라 그렇게 뇌리에 남을 뿐이죠.삼국사기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네 번 목판본으로 찍고, 한 번 금속활자본으로 찍었습니다. 딱 이렇게만 찍었다가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 판본을 검토해 보니 이렇습니다. 현재 통용되는 각 판본의 연대는 아래와 같습니다.구분판본연대목판1차1146(인종 사후)~1174(명종 4년) 사이2차(..
1. 모스크바의 네오나찌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보다 더 많은 전사자를 보고 있다. 이른바 구쏘오련의 몰락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한 수저 정도는 관련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만으로도 최대 10배 정도 되는 상황이다.(최소한으로 봐도 5배) 일단 쏘오련과 지금의 네오나찌들은 희생에 매우 둔감하다. 병사는 밭에서 캔다는 말은 그만큼 병력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사실 가치가 없다는 말에 더 가깝다. 어쩌면 총통 푸틴은 우크라이나에게서 좀 많은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씨아인들은 궁핍하고 고단한 건 늘 있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설령 이겼다고 해도 네오나찌국이 감당해야할 댓가는 아프간 때보다 더 크다. 아무리 소수민족 위주로 뽑았다지만 그렇게 많은 병사들은 죽음은 그렇게..
아까 정구복 으르신 책을 읽다가 뭔가 찾아봐야해서 "시민의 한국사"를 폈다. 그런데 후고려(이 왕조의 패악질은 4~5세기 이후 고구마가 국호를 고려로 글자를 줄였음을 감추고, 그 이름을 오롯이 자기 이름으로 한 것에 있다. 그래서 돌라 안둏아해)의 문화 부분에서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부식옵하도 아직 먹도 안마른 따끈따근한 "자치통감"을 구해다 썼고,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숙종(그래도 후대 왕조의 세조와 달리 조카를 담그진 않았다!)의 장서인이 찍힌 "통전"이 있긴하다. 소동파가 책수출금지같은 소릴 지끼긴 했는데 실제론 고려에서 사라진 책을 구하는 중이었다.(사실 소동파가 혐한한 건 "글안"을 물리치고 이 후고려 사신놈들이 대패한 송나라 놈들 약올려서란 얘기도 있다) 한서, 진서, 당서(아마 구..
지금 서예에 쓰는 붓의 모양은 자루는 가늘고 붓모는 풍성한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초창기, 그러니까 문사사용의 이른 시기의 붓은 지금 서예용 붓보다는 이 붓펜에 더 가깝다. 붓 자루에 비해 붓모가 매우 가늘고 얇다. 자루를 뛰어넘은 현대의 것과는 다르다. 그리고 선진과 진,한대의 붓 끝은 끝이 뭉툭하나 끝으로 갈 수록 좁은 모양을 하는데, 현재처럼 붓 뚜껑도 없고, 달리 필통같은 것이 없을 때, 머리에 비녀처럼 꽃고 돌아다니는 용도로 디자인된 것이다.(종종, 펜을 저렇게 꽃아쓰고 다녔는데... 아~! 짐순이의 1회차는 선진과 진,한 어드메에 위치하는 것이란 말이냐!) 붓의 길이는 보통 23cm 내외 당시 한대의 1척을 기준으로 규격화되었다. 창원 다호리나 김해에서 출토된 붓도 이 길이 규격에서 크게 벗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