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이 박물관이 개장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곳을 갈 수단이 마땅치 않았고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오늘에야 다녀왔습니다. 삭주에서 40km 정도 떨어진 곳이라 그리 가볍게 갈 곳은 아닙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6~8차선 고속도로가 있는 곳도 아니고 구불구불한 산길에 반절은 왕복 2차선을 달려야 했으니까요. 화천박물관의 전경을 찍지는 못했습니다. 앞에서는 주차장을 찾아야 했고, 나오며 찍자고 마음 먹었지만 또 나오느라 한참 지나니 아차 싶더군요. 제법 큰 3층 건물의 공간인데 코로나 덕분인지 다른 관람객도 없었군요. 심지어는 직원들도 못본듯. 1층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조선시대 양반들의 방을 복원한 것이 반깁니다. 이런 걸 어디서 봤더라? 왕경의 종로에 이런 전시공간이 있지요. 유리바닥 아래 실제 유적(그..
고려시대의 문서관리 자료를 보다보니, 고대의 문서관리가 몇몇 선생님들 생각처럼 마구 소급해서 ~~이럴 것이다~~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려 중기에도 중국과 통하는 공문서를 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고, 공민왕 때도 홍건적이 쳐들어오니까 자료들을 땅에 묻어 보관했는데, 물러나고 다시 찾으려니 귀찮다고 폐기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그나마 한 명이 난리쳐서 수습 안했으면 상당수의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 하니, 그 전에는 그 기록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투철했겠냐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유지기가 "사통"을 쓰던 시절, 빡쳐버린 현실이 한반도에서는 고려 중후기에 나타난달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처음 사관이라는 관청을 두어, 에전처럼 외주 주지 않고 직접 전생산공정을 관리하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 불협..
475년의 파국에 대해서 대개는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는, 매우 건조한 문장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수도를 잃었다, 왕이 죽임을 당했다, 그 정도면 꽤 아팠겠다 싶은 인상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475년 한성 함락은 백제인들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건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데, 사실 실상을 알고나면 어느 정도는 공감가는 일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고민 거리 중 하나가 지방소멸, 수도권의 비대화입니다. 그런데 고대에는 아예 머리가 8, 몸이 2인 상황입니다. 수도에 모든 것이 몰려 있는 정도가 극단적으로 심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을 보여주면 서울은 아예 식물인간 수준이 아니냐고 할껍..
한번 상상해보자. 1970년대 효창공원, 혹은 1980년대에 독립기념관 앞에서 일본 총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대해 사죄하는 장면을. 천황은 직접 오지 못하더라도 통석의 념같은 두루뭉실한 단어 대신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장면을. 누가 총리였던 간에 그 장면은 브란트의 사과 만큼이나 울림이 컸을 것이다. 적어도 몇몇 빌어먹을, 얼어죽을 이들이 말하는 과거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표현은 지금보다 더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에 대해선 진지하게 사과를 한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않고,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 참의원과 중의원에서 약간이나마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을 가..
예전에 대구지역 소국의 발생과정을 정리한 적이 있는데 윤용진 선생님 이후 몇몇 분들이 시기별로 취락이 어디에 형성되었다 사라지고, 또 어디는 커지고, 어디는 또 다른 곳에 '소속'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지도 위에 점을 찍어 시기별로 커지고, 사라지고 새로 생기는 과정을 동영상처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한번 시도해보긴 했으나 영 파이였다. 움직이는 건 지온놈들 때려잡는 거 빼곤 못한다.) 삭주에도 그걸 하면 둏긴하다만, 문제는 댐이다. 의암, 소양 등 여러댐의 건설 이후로 춘천의 지형이 은근하게 바뀌었다. 지금의 위성사진을 펴놓고 거기에 점을 찍어 유적의 위치, 변천과정을 추구하다보면 원래 지형에 입각한 것과는 다른 결론이 나온다.(많은 글에 그리 되어 있다) 강만 넓고 깊어진 게 아니다.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