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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연휴를 끝내고 간만에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들어 갔습니다. 원래는 강진의 전라병영성 자료를 구하려던 것인데 간 김에 보도자료도 보자.. 이런 식이었죠. 소식이야 날로 쌓이는데 고대사 관련한 소식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네요. 사실 이 기사는 얼마 전에도 제목만 보고 넘겨버린 겁니다. 사실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파서요. 신라 무덤의 비밀을 품고 있는 중앙아시아 초원 기마민족의 고분을 발굴하다 신라고분이 북방 알타이계 유목민족들의 무덤과 유사하다는 것은 꽤나 오랜 단골집 사골과도 같습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이래로 잊을만하면 기어나오는 한민족은 북방에서 기원한 민족이라는 설과도 연결되어 그걸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이용되어왔지요. 호주의 레드야드 ..
지난 글에서 조신이라는 승려 이야기를 하면서, 적어도 고대사에서 아내를 거느린 승려는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그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여인의 분냄새라도 맡았을 사람들로 원효와 광덕을 꼽았습니다. 원효야 파계를 하고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예욉니다.(물론 사고치던 시점은 아직 승려) 이런 예를 들어 아내를 가졌을 수 있다고 하기엔 무립니다. 개가 사람을 문 것과 사람이 개를 문 것 중 무슨 사건이 대서특필 되겠습니까? 그렇게 어쩌다 사고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다수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광덕입니다. 삼국유사에는 그를 사문沙門이라 적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문은 출가한 승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애초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불교 교단을 세울 적에 출가한 남녀 수도자를 각각 비구와 ..
일요일, 쟈브로경 해밝은 날에 뒤늦게 일어나 거실을 좀비처럼 노니는데 이불에 발은 없고(모빌아머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한참 삼국유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날 이 시간에 재미없는 이야기만 나온 것 같은데(중국경제 찬양론만 읊조리거나) 그래도 고대사 이야기하니 귀는 끌립니다. 그러나 어제 들이마신 미노프스키입자가 내부 기관을 자극하야 속청소를 하느라 잘 듣지 못하는데 순간순간 듣자니 고대사 전문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래 이어질 인용문에 나오겠지만 조신을 재정만 관리하는 승려라 결혼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 나온 이판승과 사판승의 싸움도 아니고(조선후기에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분리되는데 이판승은 수도, 사판승은 재정을 담당하지요. 이것은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이판은 ..
100년전까지 동아시아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소농민(토트넘으로 이적한 어느 축구 선수를 말함이 아닙니다!) 보호에 있습니다. 역사책은 군주의 잘잘못과 여인들의 규방대결과 간신배의 사악한 행위에서 그 국가의 멸망을 이야기하지만 근본적으로 국가는 소농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무너졌습니다. 그렇다고 농민이 현대의 노동자들처럼 뚜렷한 경향성이라거나 헤아리기 편한 지표들을 드러내진 않습니다. 청나라가 들어서고 변발과 호복을 강요했을 때 가장 오랫동안 저항한 것은 농민층이었고, 지난세기 초 신해혁명으로 그것이 폐지되었을 때 가장 저항한 것도 농민들이었습니다. 신분제 철폐과정에서 가장 반발한 것도 농민들이었지요. 현대의 노동자계층과 달리 농민들은 아프고 괴로울 때 바로바로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비명을 지..
고대사와 고려시대사의 문제가 섞였습니다. 인간과 기계가 융합된 전투생명체도 아니고(유키카제냣!) 뭐, 하긴 돌아가셨지만 사회경제사의 개척자시기도 한 강진철 선생님의 시대구분에 따르면 무신정권까지도 고대사인 겁니다! 위 문제의 정답은 무엇일까요? 저 신라의 토용은 아마 서남아시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침 원성왕의 무덤이라는 괘릉에서도 묘 입구에 눈을 부라린 거대한 서아시아인의 조각상이 서 있지요. 무함마드 깐수로 알려진 정수일 선생님이 여러 논문을 통해 8세기 이후 아랍인들의 신라인식에 대한 논문들을 쓰셨지요. 얼마전에도 아랍의 이야기책 하나가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지요. 나라를 잃은 왕자가 신라로 피신해 그만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둘이서 복국을 시도하다 망한 후 둘 사이의 자식이 결국 성공하는..
오늘은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문제입니다. 약간 난이도가 높죠? 이 지문의 글은 광개토왕릉비의 영락 9년(399)과 영략 10년의 기사 중 일부입니다. 비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왕이 얼마나 고귀한 혈통을 가졌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주몽의 건국신화를 간단히 서술하고 왕은 주몽의 17세손임을 밝히는 대목과 바로 이 왕의 이름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근거라할 땅따먹기 전적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왕의 무덤을 관리할 자들에 대한부분입니다.(사실 분량은 마지막 이 부분이 가장 많지요) 지문은 그 중에서 가야와 관련한 대목을 따왔습니다. 먼저 생각하야할 것은 이 비문이 당대에 쓰여진 최고의 자료이긴 하나 완전히 정직하진 않다는 겁니다. 이 비문은 고지식한 사관의 기록이 아닙니다. 아들인 장수왕이 "우리 아..
갑자기 다음 메인에 괴상한 제목 하나가 떴다가 금새 사라집니다. "위만조선 수도, 한반도에 없었다"마침 컴퓨터를 켜던 짐순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얼른 기사를 클릭하고 가사를 본 후 해당 항목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검색을 한 후 기사에 인용된 논문을 구해냅니다.(다음은 사이크 검색이 GR맞아 구글까지 갔습니다.. 뭔 놈의 연구기관 주소 검색이 안되는 검색포탈따위!!) 우선 저자들을 확인한 후 한 번 갸우뚱합니다. 순간 뒷 골이 싸늘해집니다. 적어도 금세기에 들어서 사회과학 쪽에서 역사 건드리는 거 치고 폭탄 아닌 게 없었는데.. 쩝. 맨 앞의 요약을 읽어봅니다. 순간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읽을 때 느낀 기분이 되살아납니다. 천팔백! 아자씨들은 답답하거나 뭔가 이상할 때 담배를 핀다던데.. 짐순..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 고조선에 대한 책만 뒤지던 중(이봐, 짐순양~ 백제 본다며??? のヮの~♪) 또 이러저러한 일로 동예와 옥저도 레이더망에, 아니지 미노프스키입자가 살포되었으니 광학센서로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학계에서는 동예와 옥저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북한학계에선 아예 그거 뭐임? 먹는 겁네까? 이러고 있지요. 조선통사나 조선전사에서도 고조선과 진국, 그 다음이 삼국입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조선단대사에서도 부여나 조금 나와줍니다.(짐순이는, 짐순이는 각각 조선통사는 진단학회 한국사, 조선전사는 구편 한국사, 조선단대사는 신편 한국사에 대입시켜 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이 필요하다면 신편한국사의 4권을 보는 것외엔 뭘 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성부카니스탄왕국의 고대사..
이 문제의 캡쳐를 뜬 것이 무려 5월 6일입니다. 그러니까 두 달 동안 안하고 있었다는 거죠. 게다가 문항만 들어있는 화면이니 이게 몇 회 몇 급이지 싶어서 2회 문제들을 들쳐보았는데 없네.. 다시 보니 무려 1회 문제로군요. 이러다 진도 따라잡는데 백년 걸릴 기세.. 이런저런 일로 많이 늦어졌지만 이제라도 다시 달려봅니다. 적어도 100년 중 90년은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근데 진짜???? -_-;;) 사진 속의 무덤은 장군총입니다. 이게 뭔지 순간 기억이 안난다해도 화살표의 위치로 보아 북쪽의 나라니 적어도 신라와 백제, 가야의 무덤은 아니겠지요. 정답은 4번입니다. 장군총이 만들어지던 고구려 중기(5세기라 퉁쳐두죠. 아직도 고구려 왕릉의 주인 비정은 논란진행중입니다. 미확인으로 진행중? -..
1. 서론을 가장한 배경이야기 며칠전에 어느 게시판을 돌다가 일본의 천황가가 백제의 후손인걸 아느냐고 말하는 댓글을 읽었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금방 까먹었습니다. 그냥 아직도 저 이야기를 많이들 하고 있구나..라고 놀란 기억이 납니다. 가끔 이야기하는 거지만 짐순이는 어린 시절 환빠였습니다. 그보다 약간 전에는 80년대 재야측 한일관계사 연구의 영향권 아래 있었습니다.(짐순이에게서 요즘 아이같지 않은 오래된 냄새가 난다면 그 영향입니다. 나쁜 환경!! 아이에게 역사책을 '너무 많이' 읽히는 건 해로와요..)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20세기가 만들어놓은 악령 속에서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러나 19살 짜리의 눈에 들어오는 한국 사회, 어디나 안그런데가 있어야죠.. 어떤 사람..
문명의 개념, 도시와 국가의 관계 영어권에서 문명(civilziation)은 도시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도시는 대내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군사 등의 여러 측면에서 중심지 기능을 하며, 내부적 공간에 각각과 관련된 시설과 인구를 갖춘 공간을 일컫는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권력자가 거주하거나 권력기구가 구비된 궁정건축물, 경제적 측면에서는 근린 주변지역이나 원거리에서 유입된 물자가 저장되고, 유통되는 시장기반 그리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도시 자체는 물론 주변의 인구집단이 모여 종교적인 제의를 수행하는 시설 등이 갖추어져야 한다. 군사적으로 내부의 질서나 통제를 담당하고 대외적인 방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방어시설과 전사집단체제가 갖추어져야 한다. 또한 식량생산 이외에 수공업 제품이 생산되는 공장..
몇년 전부터 고대사에서도 현재의 국경, 국가의식에 얽매이지 말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마침 동북공정의 폐혜에 직면하고 있던 우리에겐 꽤나 솔깃한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 짐순이도 그 기본 논의에 공감을 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20~21세기의 현상황에 맞추어 과거의 역사를 재단하는 것 자체가 사료의 훼손 다음으로 심각한 역사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본격적인 서유럽사의 가장 큰 뿌리는 프랑크왕국입니다. 카롤루스대제가 나라를 세운 이후 그 아들들에 의해 삼국으로 분단되지요. 그것이 현재의 프랑스, 독일, (북)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한국의 세계사 시간에도 배우던 것을 정작 유럽인들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그 이후의 서유럽사에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가 다같이 어께를 맞대고 ..
이 문제의 국가는 가야입니다. 그러니까 가야의 역사적 특징을 묻는 것이지요. 지도가 보이자마자 어느 나라를 묻는 것인지 바로 떠올라야죠.(수험생은 그렇다! 수험생은!) ① 무열왕이 아니라 진흥왕입니다.③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은 신라의 묘지입니다. 천마총, 금관총, 서봉총, 황남대총이 이런 무덤이죠.④ 율령반포, 불교공인은 법흥왕의 업적입니다.⑤ 5부 5방은 백제입니다. 이렇게 소거법으로 하나하나 쳐내면 남는 것은 하나. ②번이죠.
위진남북조시대의 의미 1. 위진남북조는 어떤 시기인가? ① 중국 역사상 후한(後漢)의 멸망부터 수(隋)의 재통일까지를 위진남북조시대(220~589)라고 통칭함. ② 중국에서의 ‘고대’사회였던 한이 멸망하고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무너짐으로 시작함. 앞선 시대인 진ㆍ한제국이 중국인 중심으로 유지되어온 반면,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북방의 호인들과 중국인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하면서 중국 역사의 새로운 흐름을 열어낸 시대.③ 한제국의 활발한 대외정복으로 북방의 여러 종족들이 중국 내지로 강제 이주당함. 이들의 존재를 중국의 중앙정부가 억제하지 못함에 따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단초를 제공함. 2. 위진남북조 시대의 변화 가. 삼국ㆍ위ㆍ진① 후한은 서기 184년의 황건적의 난으로 사실상 몰락. 권력은..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도 처음부터 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을 겁니다. 역사책만 보면 건국하자마자 영토는 광활하게 펼쳐지지요. 백제만해도 시조 온조왕 때 마한이 박살났지요. 기록을 액면 그대로 따르자면 지금 글을 쓰는 춘천까지도 백제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물론 짐순이는 믿지 않아요) 그러므로 역사기록에는 움막을 짓고 기틀을 다지던 시대에 왕을 무어라 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각각 백성들이 왕을 부른 명칭이라는 것이 중국기록에 전해지지만 그것도 후대의 별칭이지 발전 단계별 지배자의 호칭은 알 수 없습니다. 신라는 그것에 비하면 기록이 풍부합니다. 물론 살아남은 자니까 많이 나올 수 있지요. 그렇지만 신라의 발전도상이 완만한 것이 살아남은 것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라의 발전단계마다 달라지는 지배..
오늘 춘천 북쪽의 어느 산에 올랐습니다. 무슨 공사를 하는 중에 옛 절터로 보이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짐순이가 마지막으로 산에 오른 건 09년인가 백두산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막전수전공중전우주전도 다 겪어본 역전의 용사지만 아아.. 산악전은 정말 싫어요. 그래서 산은 안가는게 최고이고, 산은 올라가 밟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고 음미하는 것이 신조였습니다만.. 아아.. 길도 없는 곳에서 미끄러져 옷 다버리고.. 히잉.. 산에 올라 바라본 춘천시내. 좀 있다가 좀 더 넓게 펼쳐진 풍광이 있었지만 그땐 그럴 정신이.. 요때까진 제정신.. 뒤에 나올 사진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이야기거리가 많은 건 이 사진입니다. 뭔가 여기가 절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와. 기와 만드는 기술도 과거엔 꽤나 고급기술이었지요..
한국 고대사에서 자주 다루지 않는 마이너한 주제가 나왔습니다. 오히려 연구자들보다 사교육계에서 많이 다루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고조선 이후, 삼국 이전의 초기국가를 묻는 내용은 자주 나오지 않지만 나온다면 뻔합니다. 부여, 고구려, 삼한, 옥저, 동예의 특이한 풍속을 묻는 게 많죠. 여기에 항상 봐야할 것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포수와 투수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처럼 이 부분의 문항과 삼국지도 결코 따로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저 지문은 삼한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삼한의 종교에 대한 부분이군요. ㄱ~ㄹ 사이에서 삼한에 해당되는 내용과 다른 국가들의 내용을 구분해야 합니다. ㄱ. 삼한이 맞죠. 특히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에 이르는 한반도의 곡창지대를 끼고 있으니까요. 단 철 이야기가 나오..
어! 5지선다다! 짐순이야 5지선다 세대기 때문에 앞서 초등 문제에서 4지선다가 나오니 신선했지요. 아아. 이게 과거의 유산이로구나.. 듣기만 헀던 과거의 유산을 실견하다 다시 현세로 돌아오니 오히려 어색해요. 문제는 석기만드는 법을 묻는 거지요? 그것도 뗀 석기를 만드는 법입니다. 정답은 뭐겠습니까? 무지 쉽죠? 1번은 가락바퀴라고 옷감 짜는데 쓰는 것이고, 2번은 수확용 도구인 반달형 돌칼입니다. 4번은 청동 도끼를 만드는 주형틀이죠. 교과서에서는 거푸집이라 배웁니다. 5번은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오늘 어느 박물관에서 석기에 대한 원서를 들쳐봤는데, 당근 그림만 봤죠. 석기로 고기를 써는 것을 재현한 사진이 나왔어요. 긴 설명보다 그 사진 하나가 많은 것을 담지요. 나중에 스리슬쩍 해올 수 있..
아아.. 가장 닭살돋는 내용은 삼국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고구려는 어쩌구, 백제는 어쩌구, 신라는.. 블라블라 하는 대목입니다. 이런 내용을 접할 때마다 어찌 그리 남사시러운지. 다행히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엔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닭살돋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단순합니다. 6급이니까 저학년도 푸는 문제기에 아이들의 지적 발달 수준을 크게 상회하는 문제는 나오진 않죠.(물론 1학년 짜리를 갈궈서 70점 맞게 하는 엄마도 있습니다) 문제만 보면 정말 답은 뻔합니다. 삼국시대 문화재를 묻는 문제지요. 7차교육과정의 개정안이 시행되기 전 4학년 사회교과서엔 우리나라의 오래된 수도와 중요 문화재, 세계 문화유산에 대해 배웠지요. 당시엔 6학년 때 한 학기에 배우는 한국사를 듣지 않아도 이런 문제는..
가) 감독으로는 꽝이었지만 선수로서는 전설 중 전설인 분이 고대사도 잘 아십니다. 주몽은 고구려, 온조는 백제, 박혁거세는 신라를 세웠지요. 나) 솔직히 고대사 개설에서 일본으로의 문화전파를 다룰 때마다 그닥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미국사에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문화를 건네준 사람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라) 모두 맞지요. 을지문덕은 살수대첩, 연개소문은 패수대첩, 양만춘은 안시성 대첩. 모두 민족기록화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안시성은 안그려졌던가??) 언젠가 다룰 이야기지만 양만춘이란 이름은 고대사의 이름이 아닙니다. 당대 기록은 전부 '안시성의 성주'이지요.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야 안시성의 성주 이름이 양만춘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이른바 4세기 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