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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몇 달째 가와다 준조의 "무문자사회의 역사"를 읽고 읶는지 모른다. 올해 초의 석달하고 반에서 한달 반 가량은 일을 하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고, 두 달 동안은 마치 1차대전 참호전과 같았다. 이 책말고도 읽어야 할 것도 많았지만, 이 책이 한 문장, 한 문장이 그냥 스쳐지나갈 수는 없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매우 천천히 음미할 책을 골랐달까. 문제는 올해안에 마치기로 한 작업에 이 책이 매우 중요한 지도서라는 것. 본디 대외관계에서교역을 전쟁보다도 아래로 보았고, 이제는 외교행위보다도 한참 떨어지는 중요도라고 본다. 알려지면 곤란하지만, 한국고대사에서 교역이 가지는 중요성을 매우 낮게본다는 말이다. 물론 청동기~초기철기, 거기에 낙랑을 더한 초기교역과 7~10세기 황해, 또는 동아지중해 교역의 ..
고대국가에서 관료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갠적으로, 개機적으로 고려시대도 관료제의 외피를 쓴 귀족제 국가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관료제론은 학설사로서의 의의는 있겠으나(연구 질적으로 심화) 실제 연구에 있어서는 사료를 넘어선 가정에 불과하다. 고구려는, 고구마 대제국은 질서정연한 관료제와는 거리가 먼 형태다. 어지간하면 고대사의 변명거리인 '자료가 없어서 그렇지 ~~을지도 모른다'를 쓸 여지도 없다. 수당에게 있어서 고구마는 돌궐을 제칠 수는 없겠으나 토번에 이어 악의 축에 들 정도의 중요도는 가진다.(위구르도 있지만 이건 고구려멸망 후의 문제라 여기선 뺀다)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병부 직방낭중 진대덕이 와서 정보를 살폈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의외로 병부 아래, 아니 6부 아래 4개의 담..
보내주신 편지를 받자오니, 삼가 과분하옵니다. 이곳에 있는 이 몸은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어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 주옵소서.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나이다. 부여 구아리 319유적에서 2010년 발견된 목간 중에 나온 소위 442번 목간의 해석문이다, 나중에 다른 책에서 손을 본 문장이 실렸는데, 갠적으론 처음 나온 해석이 더 역사적인 상황에 더 부합한다고 본다. 고대국가, 아니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국가의 특징 중 하나가 매우 극단적으로 작은 정부라는 것이다. 시민의 상당수가 공무원 및 그 가족이라는 북유럽 국가 얘기를 당시 사람들이 들었으면 까무라쳤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 후 신라의 중앙정부 관리 정원이 3,600명이다.(여기에는 군 ..
475년의 파국에 대해서 대개는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는, 매우 건조한 문장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수도를 잃었다, 왕이 죽임을 당했다, 그 정도면 꽤 아팠겠다 싶은 인상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475년 한성 함락은 백제인들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건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데, 사실 실상을 알고나면 어느 정도는 공감가는 일입니다. 현재 한국 사회의 고민 거리 중 하나가 지방소멸, 수도권의 비대화입니다. 그런데 고대에는 아예 머리가 8, 몸이 2인 상황입니다. 수도에 모든 것이 몰려 있는 정도가 극단적으로 심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을 보여주면 서울은 아예 식물인간 수준이 아니냐고 할껍..
예전에 대구지역 소국의 발생과정을 정리한 적이 있는데 윤용진 선생님 이후 몇몇 분들이 시기별로 취락이 어디에 형성되었다 사라지고, 또 어디는 커지고, 어디는 또 다른 곳에 '소속'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지도 위에 점을 찍어 시기별로 커지고, 사라지고 새로 생기는 과정을 동영상처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한번 시도해보긴 했으나 영 파이였다. 움직이는 건 지온놈들 때려잡는 거 빼곤 못한다.) 삭주에도 그걸 하면 둏긴하다만, 문제는 댐이다. 의암, 소양 등 여러댐의 건설 이후로 춘천의 지형이 은근하게 바뀌었다. 지금의 위성사진을 펴놓고 거기에 점을 찍어 유적의 위치, 변천과정을 추구하다보면 원래 지형에 입각한 것과는 다른 결론이 나온다.(많은 글에 그리 되어 있다) 강만 넓고 깊어진 게 아니다. 사..
살수대첩에서 수공하지 않은 것은 알기 싫냐?(번외 - 01) 오늘 올라온 그것은 알기 싫다 7회를 듣다보니 또 직업병이 도졌는데 금강산댐(북한식 명칭 : 임남댐)을 다루는 부분에서 살수대첩 수공 얘기가 나왔다. 결론만 먼저 이야기하자면 살수대첩 수 rgm-79.tistory.com 아직도 살수대첩은 수공인가... 며칠 전에 아는 중딩과 이야기를 하다가 살수대첩을 수공으로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과서에 있다는 겁니다. 엥? 마침 교과서를 가지고 있길래 한번 펴보자고 했더니 그런 얘긴 rgm-79.tistory.com 이미 두 편에 걸쳐 살수대첩 수공설에 대해 끄적였습니다. 그 후로 글을 새로 판 건 아니지만 페북에선 종종 구시렁대곤 했죠. 대체 이게 누구 소행이냐. 짐순이는 해방 이후 국난극복사..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느냐를 두고 수십년간 싸웠는데, 지금까지의 결론대로라면 결코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한 문단의 기록에 요즘식으로 말하면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그리고 반일종족주의, 부카니스탄의 현대사 인식이 골고루~ 골고루 섞인 서술이 나온다. 방금 이 말이 선뜻 이해가 안된다면 행복한 닝겐이시라는 증거다. 그 옘병할 글을 안보는 것만으로도 아다마의 안위는 보장된다. 또 태극기부대는 무식하게 런승만과 부뚜막을 동열에 놓지만 시바스리갈 쳐마시다 뒈진 반신반인은 런승만을 증오하는지라 매우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마치 양녕대군의 후예인 코리안 프린스가 충녕대군 후손의 왕실을 증오하던 것처럼,(어차피 가까운 시기에 갈라져나온 서자계열이라 양녕대군 계승이어도 기회는 없겠다만..
몇년 전에 지인으로부터 철원 고석정에 대한 기록에 진흥왕이 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실렸다고 들었습니다. 그걸로 뭘 이야기할 수 있지 않냐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 늘 그렇듯, 게으름은 타인의 기회를 낳습니다.(물론 찾아보니 이미 논문이 하나 나왔고, 또 최근에도 하나 나왔습니다) 지금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에 분계선이 하필 철원을 지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반도의 중요 교통 요지로 자리하는 곳입니다. 현대에는 통일 후 한반도의 교통축선을 서울을 중심으로 K자 형태로 구상하는데, 사실 어느 시대나 한반도의 내륙 육로는 K자였고, 선들이 만나는 곳 중 하나가 철원입니다. 특히나 두만강 하류부터 서울로 오는 길목이기도 하고 영동의 동해안에서 중부로 오는 길..
춘천의 고대사를 이야기할 때, 637년 우수주의 설치, 이후 삭주의 설치를 중요하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세워졌던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문헌기록으로 간략하게 언급이 될 뿐, 어느 정도의 규모는커녕 가장 기본적인 행정중심지의 위치조차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연구자들의 시점대로라면 춘천이 우수주, 삭주의 중심지였다는 것 조차가 의심되는 것이다. 위의 그림은 대정 7년(1918)에 만든 지도로 한반도의 옛지형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지도는 토목기술의 발달로 지형을 변화시키는 수준이 되었으며 그 이전의 지도는 현대 지도가 요구하는 매우 정확한 지형을 보여주는 것과 거리가 멀다. 춘천의 과거를 설명하면서 20세기 후반부터 21세..
이따금 경주의 복원 CG라며 돌아다니는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황룡사를 검색하면 빠짐 없이 나오는 것이었는데 그 출처를 얼마전에야 알았습니다. 2016년에 경주시에서 제작해 공개한 영상의 그림이었습니다. 어느 커뮤 게시판에 올라왔던 걸 추적하다 보니(거기도 출처는 없었거든요) 발견한 것인데 거기에 실린 댓글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대개는 이렇게 거대할 리 없다. 조선시대 한양도 이거보다 작고, 거긴 초가집도 많았는데 이 화면에선 전부 기와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과정이 너무 심하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사실 그 반응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 한양도 그리 대도시가 아닌데 천년 전의 도시가 더 크고 반짝반짝 할리 없다 생각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남겼다는 "고려도경..
한국의 역사학계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실상은 대우주의 저편 만큼이나 먼 것들이 많다. 1. 외부에서는 이 사람들을 매국노의 정신적 기반으로 보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역사학계의 대부분은 민족주의자/국가주의자에 가깝다. 나름 여기서 진보라고 불려도 전세계 역사학자들 모아놓으면 극우는 아니지만 꽤나 우파 한복판에 우뚝 선다. 관악산 아래 뾰족철문 학교도 사실 민족주의적이라고 하면 다들 '미대통령이 도람프라고 니도 도랐나?'하겠지만.. 2. 한국의 고고학자들의 상당수는, 또는 일부는 고고학 없이는 고대사는 존립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중에 만들어진 문자기록 보다는 고고학 유물이 당시 현실을 더 잘 보여준다고. 가끔 유구 도면도 볼 줄 모르는 문헌학자들이 보고서 결론만 보고 지낀다고 불만을..
한국고대사연구에서 고대 언어를 활용할 수 있을까?어떤 이들에게는 신선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른바 '업계'에서는 오히려 진부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지겨울 정도로, 비유하자면 항생제 사용은 아무것도 아닐 수준으로 남용하고 있었거든요. 과거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후 한국고대사연구의 기반을 다지는 초창기까지 긴 시간에 걸쳐 언어를 활용한 연구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특히 역사학계가 주목한 것은 위치비정과 같은 역사지리였습니다. 일단 이해를 돕기 위해 사설을 풀자면, 소위 사람들이 상상하는 '고차원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선 가장 기초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무슨무슨 전투로 인한 국제관계의 변화같은 거시적 연구를 하기 위해선 일단 무슨무슨 전투가 어디서 일어났는지부터 이야기해야합니..
한때 고고학과 고대사 업계에서는 전파론이 강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선진 문물이 저쪽에서 '하사'되어짐을 당하면 넙죽 엎드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하고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혹시라도 지난세기 80년대를 풍미한 고대한일관계사 이야기를 접하신 적이 있다면 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거의 삼국인들이 일본인들 턱 붙잡고 '아~해, 이 色姬야'하고 신문물 한 숫갈 입에 물렸다는 식의 관점. 그러나 문제는 중국과 우리로 무대를 바꾸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의 식민사관이 그리 주장하다 80년대 한일고대사로 작게나마 복수하였다고 우겨보면 편하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을 중시하는 수용론이 쥬류가 되긴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고 좀 더 냉정하게 사안을 분석한다는 것..
베트남의 삼국사기라 할 수 있는 "대월사기전서"는 이름만 알려졌지 책을 구경하기 쉽지 않다. 아니 흠향하기도 어렵다. 지난세기 일본에서 교감본 나온 것은 서울대랑(동양사학과 행정실인가 자료실로 안다) 연대고대 등에 있는데, 몇 해전에 듕궉에서도 나온 것 같다. 이건 경상대만.삼국유사격인 영남척괴열전은 번역본이 나오긴 했다.(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검색해보니 품절이넹) 그치만 짐순이는 오니짱의 대월사기전서가 읽고 싶은 걸. 과연 번역본이 나올까나? 표점본은 고사하고 영인본도 안도는 판에.. . 며칠전 공주대 발표에서 예식진의 가문 선조의 이름이 어느 것은 외자, 어느 것은 두글자냐 이걸 이야기하던데. 아무래도 백제왕의 이름이 외교문서와 국내기록이 다른 것은 잘 주목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통왕조에서..
리뷰글을 보다보면 짜증나는 요소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자기 생각, 취향, 필요랑 차이거 나면 돈낭비라고 하는 댓글이다. 음식으로 치자면 김밥천국이나 편의점 음식 이상은 무조건 돈낭비다. 물론 가성비는 물건을 고를 때 중요한 기준이다. 애써 저품질의 물건을 고비용을 주고 사려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은 맞다.그러나 물건의 쓰임새는, 그 가치는 가성비만으로 정해지진 않는다. 무조건 편리함만을 따지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이 있다. 다른 생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닐까?강원도 원주시 행구동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도자 의자의 파편을 두고 한 번 생각해보자. 고려와 조선시대에 청자와 백자로 만든 의자가 있는데 행구동에서 발견된 것도 그 ..
오늘 아침에 고구려사 관련 두 건의 신문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조를 재해석한 기사,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대한 기사입니다. 두 건 다 학술대회에 발표되었거나 예정인 내용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 문제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젖먹이일적부터 다짐한 것이 광개토왕릉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관심을 끊자였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수정과의 잣 정도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부러 압에 담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뭐 공부하면 되지 않겠나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광개토왕릉비는 베트남의 정글과도 같습니다. 발을 들이밀면 다시는 못나갈 것 같은 예감. 다만 빨리 교통정리가 되어 맘편하게 과실만 쪽쪽 빨고 싶을 뿐입니다.(교통정리가 될리가 있..
대항해 시대 이전에도 세계는 어렴풋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늘 있어왔다. 앙리 피렌느도 지중해 한정 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 세계체제 이전의 교역망에 대해 다룬 것도 책으로 있었고(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 뭐 근세 르네상스 이전에도 르네상스는 여러번 있었다는 것처럼. 8~9세기의 동아시아도 나름 해상교역망이 촘촘하게 짜여진 건 사실이고 장안과 광주, 그리고 울산을 연결하면 유라시아대륙의 서쪽과도 이어지는 선이 드러난다. 나라의 정창원을 뒤지면 일본과 왕래가 없던 인도 출처의 약재가 나오고, 2~3세기 돈황에서 신던 것과 거의 유사한 펠트 신발이 나온다. 경주의 왕릉에서 딱봐도 서역스런 사람의 석상이 보이는 건 과연 우연일까? 시오노 나나미가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말한 것같은 해상..
두보의 '석호의 관리'에선 아들들을 모두 징집하고도 모자라 할아버지를 데려가겠다며 관리가 문을 두드린다. 산상억량의 '빈궁문답가'에선 밀린 세금을 내라고 촌장이 문을 두드린다. 시대는 늦지만 '청산별곡'에서는 이링공디링공하야 선을 넘으니 사슴이 울타리에 올라 금을 켜는 환성을 본다. 언젠가 이거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만 다시 끄집어낼 일이 생긴다.(목가죽 한 장이 엄청 즐겨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내년 상반기..읍읍) 일단 뇌의 먼지부터 털고.. 직관지/백관지, 혹은 당육전의 정교한 설계도, 혹은 스냅사진, 또는 매우 긴 시간 노출을 해서 찍은 사진만 놓고보면 아름답다 못해 현자타임 가질 판이다. 그 기록에는 아랫것들의 파열음이 들리지 않는다. 옹정제가 아닌 이상, 즈은하~ 태평..
340년대, 고국원왕은 선대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대외확장정책에서 실패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5호16국시대라는 중국의 대혼란을 틈타서 낙랑・대방군을 몰아내고 요동군과도 치열하게 싸우고 성공을 거둔 아버지 미천왕과 달리 고국천왕은 강한 저항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부의 전연이 환도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그러니까 미천왕의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끌고 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구려는 요동을 둘러싼 전연과의 다툼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남으로 창끝을 돌리면 어떨까? 낙랑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던 곳에 비해 남쪽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 ..
어떤 책을 보다가 고구려에 무언가를 만드는 관청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문장을 발견했다. 암만 기억을 더듬어도 그 관청에 대한 문헌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인에 의한) 다른 자료를 봐도 그것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언급이 나타난다. 그러면 유물에서 명문이 발견된 것일까? 그 앞서 시기별로 나온 그분의 글을 찾아보니, **유적을 살펴본봐 ~~을 제작하는 장소는 보이지 않으나 그러한 역할을 하는 관청이 존재하지 않았을까라는 식으로 서술된 대목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 것이 현재로 넘어오면서 의문에서 단정으로 바뀐 것이다. 어쨋든 만드는 곳은 있었을 것이고 신라나 백제에서 보듯 관이 주도하는 생산체계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그것은 높은 확률이다. 확실히 관청의 존재를 단정지을 자료는 없다. 실제로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