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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한 1년 전부터 기획하던 주제가 있었는데그게 바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고대사문제 해설이었습니다.마침 고대사 정리를 위해 별개로 준비하는 것도 있고여자처차하여 오늘에 이르러 그 첫 글을 선보이네요.순서는 맨 앞부터 초급-중급-고급의 순으로고대사 문제만 추려서 문제 해설을 해보려고 합니다.초창기에는 주관식도 있었지만 현재에는 없어졌으므로 그건 통과!매일 올릴 지, 주3회 가량 올릴 지는 아직도 미정입니다.그날그날의 여건에 따라 글이 비는 날에이른바 땜빵선발 식으로 올라갈 것 같네요. 뭐, 손님 끌고.. 어쩌구 하려면 가장 최근 문제부터 하는 게 좋겠지만짐순이는 그런 거 일부터 회피기동 하는 아이잖아요.(하도 지온군의 공격을 피하다보니줏어 먹는 것도 잘 피하게 된 슬픈 짐순이 체질.. 흑흑)어디 팔아먹으려고 ..
어제 거의 좀비가 된 상태에서(뭐긴 뭐겠어요. 잠을 안잤으니..) 지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백제 동성왕 때 백제가 한강유역에 다시 들어갔느냐 아니냐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뭐, 그 것에 대한 논문을 보고 의문이 들었답니다. 이래저래 한 40분 가량을 그 문제에 대해 통화를 했지요. 이란 그 논문에서 나왔다는 영유와 점령의 기본 개념, 그리고 한성 함락 후 백제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 개괄.. 고고학이야 담을 쌓고 사는지라.. (생각해보니 짐순이 주변엔 고고학자들이 고대사 하는 사람들보다 몇 배 많습니다.. -_-;;)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분명 한강 이남에 고구려 유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 백제의 흔적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론 기록만 놓고 보면 500년이니 아예 안보인다는 것이 더 이상합..
짐순이는 탑을 좋아하지만 불상은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아니, 그러니까.. 싫은 건 아닌 데 관심이 좀 적달까요?아주 엄밀하게 말하자면 열광하는 온도의 차이?굳이 좋아한다고 해야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던가.. 또는 혼자서 이문세 불상이라 부르는 삼국시대 불상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이미 몇 번 등장한 통일신라 시대 약사여래불이지요. 솔직히 아무리 좋게 봐줘도 멋지지는 않습니다.어떤 할배들은 바로 옆의 감산사 아미타여래 입상이 최고라고도 합니다. 에로에로 하다셨던가? 뭐, 허리를 약간 비튼 것에서 원조 인도의 향기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만그건 지금 짐순이에게 중요한 건 아니고.. 왜? 사람들은 이 불상을 조각했을까요?전지전능의 범용성이 아닌 단일 성능의 특수성을 갈구한 ..
병인양요의 격전지 문수산성에 신라성이 있었다.. 연합뉴스 6월 17일자 지난 6월 중순에 이 기사를 접할 적에 기사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강화도의 혈구진과 연결시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수정된 것인지 오늘 링크를 거는 기사에는 그 내용이 사라져 있군요.아니면 지금처럼 KTX에서 멍때리다 본 기사라뇌내 망상이었을 지도 모릅니다.솔직히 문화재청의 보도자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현장설명회가 한참 지난 오늘도 아무것도 올라와 있지 않으니강화도나 문화재청, 그리고 해당 발굴기관과 연이 없는 짐순이로서는"한국의 고고학" 다음호라도 기다려야할 판입니다.(만약 그 계간지에도 소개되지 않으면!!!!!!!) 이 기사를 보자마자 떠올린 것이 문성왕 6년(844)에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한 것이 떠올랐는데현재로서는 ..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이야기를 익숙하게 여겼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삼국사기만 졸라 빨고 삼국유사는 쳐다도 안보던 19살의 여아는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있었겠거니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기차안에서 노래를 하나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마침 가지고 있던 박성봉 선생님 번역본의 한글 화일에서 F2로 열심히 검색해 봅니다. 원성왕 즉위 전 꿈 이야기의 무대로만 나옵니다. 이상하다 기이편의 김유신 이야기를 뒤집니다. 고구려 점쟁이의 원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집에 돌아와 북한의 리상호 번역본을 뒤집니다. 가장 좋아하는 이민수 본과 주변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재호본은 안보입니다.. (여기까지 적던 중 이재호본의 초판 영인본이 보입니다. 아놔..) 이상하다 싶어 국사사전의 고전인 이홍직 선생님 책을 뒤집니다...
한국사학계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식민사관에 대한 문제이다. 그냥 강단사학계, 이 띱때들은 전부 일제 식민사관의 계승자로 여전히 한국사의 영광을 감추고 비하하는데 혈안이 되었다는 말. 그것만으로도 항문까지 막히고 목까지 차올라 얼른 병원가서 관장액 시술받아야할 판인데 (아니면 배에 구멍이 뚫린 상태에서 '고마해라 너무 마이 무따 아이가..'란 말이 나올 지경) 때로는 뉴라이트에 반대하는 곳에서도 한국의 국사학계를 장악한(!) 서울대 국사학과 놈들이 뉴라이트를 주도한다는 메뉴가 추가되었다. 일단은 관악산 아래 모 학교가 한국의 국사학계를 장악했다는 정의에 서울 신촌의 몇몇 학교와 소백산맥 이남의 몇몇 학교 사람들이 책상을 부숴버릴 것이며, 종종 반대파 논문보다 일본의 옛날 논문 읽는 걸 좋아하는 이도 있지..
요즘 1주에 두번 KTX를 탑니다.가뜩이나 더 병약해진 몸이라 다녀온 다음 날은 종일 시체놀이라능(아님 삼국지나 은영전 게임을 하거나 얀데.레에서 그림 저장하는 정도?)화요일에도 김양에 대한 자료를 싸들고 오가며 검토를 하다가돌아오는 기차에서는예전에 그렸던 신라 하대의 왕계보가 잘못된 것 같아서다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원래 만든 것은 이것이었는데아무래도 균정과 헌정의 순서가 틀린 것 같아낑낑대며 한글에서 표그리기를 통해 저 족보를 다시 만들었지요.(뭐, 굇수중에 한글 표로 다보탑도 그리던 이도 있었습니다..)아무래도 헌정이 형이고 균정이 동생인 것 같아서요.돌아오는 내내 더운 객차 안에서 다시 만든 게 이거.. 이제야 과거의 과오를 바로 잡았다고 의기양양했는데................. 앞의 것..
며칠 전에 아는 중딩과 이야기를 하다가 살수대첩을 수공으로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과서에 있다는 겁니다. 엥? 마침 교과서를 가지고 있길래 한번 펴보자고 했더니 그런 얘긴 없어요.(교과서에는 없어!) 다시 물어보니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 누나가 공부해봐서 아는데 그거 틀린 거임"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좀 오래전에 그렇게 친절하진 않지만 여기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긴 합니다.살수대첩에서 수공하지 않은 것은 알기 싫냐?아무래도 짐순이가 건축이나 물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해서 그렇게 구체적인 논증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읽어보니 손대야할 것 투성이네요.(혹시? 짐순이는 글감이 떨어질 것을 대비, 개판으로 쓴 건 아닐까? 에이~ 그럴리가... 연방군의 양..
원래 인간은 모순덩어리다.이것은 무슨 철학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그냥 역사에서도 흔히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흔하디 흔한 무협물, 또는 소년물에서악당은 주인공의 가족만을 몰살시키면서 주인공만은 살려두는 우를 범한다.거기에 한술 더 떠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물론 거기서 죽여버리면 그것은 주인공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거고(이른바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또는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가 되어버리니 우짤 수 없는 거고.악당의 길에서라면 그것은 있어서도 안된다.악당의 시각에서 그걸 해석하자면 변덕, 또는 모순. 그런데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난다.정말 창작물처럼 살려줬다가 극적인 복수를 당하기도 하고 또 어설픈 대처가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뭐에 홀린듯 평상시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하기도 하고..
노트북 내부를 뒤적이다 보면 뭔가가 자꾸 기어나오죠.오늘도 사진 폴더를 뒤지다보니 마주치는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과거의 2G폰으로 찍은 백제의 사람 얼굴 소조입니다.뭔가 우수에 젖은 표정이 일품이지요.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나중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다양한 불교조각상을 보았고,결정적으로 춘천박물관의 숨겨진 걸작인 나한상을 보노라니어쩌면 이것도 나한상의 한 부분이 나니겠는가 싶어요.불교미술에서 다양한 군상을 살피는데 탱화를 떠올리는 분이 많지만진짜 살아있는 표정은 나한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조만간 춘천박물관에 갈 예정인데 가서 나한상이나 찍어와야겠군요.
앞서 삼국의 문화적 접근도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백제가 바다를 끼고 있어 좀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황해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인적교류를 이어온 통로이기도 하지요.(관심이 있으신 분은 권덕영 선생님의 "신라의 바다, 황해"를 읽어주시어요)몇몇 기록을 들춰보면 재미난 것도 있습니다.오늘은 그 중에서 가장 앞서 나오는 인물을 다루어 보기로 하죠.낙랑군에 살았던 왕경이라는 중국인 이야깁니다. 王景字仲通, 樂浪䛁邯人也.[1] 八世祖仲, 本琅邪不其人. 好道術, 明天文. 諸呂作亂, 齊哀王襄謀發兵, 而數問於仲. 及濟北王興居反, 欲委兵師仲,[2] 仲懼禍及, 乃浮海東奔樂浪山中, 因而家焉. 父閎, 爲郡三老. 更始敗, 土人王調殺郡守劉憲, 自稱大將軍ㆍ樂浪太守. 建武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 至遼東, 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
제목 거창하게 만드는 거 좋아하진 않은데(짐순이두 찌라시처럼 제목낚시 할 줄 알아염! 그저 싫어서 그럴뿐)뭐 암만 짱구를 굴려도 안떠오르네요. 그동안 지리나 지구과학의 관점에서 본 역사해석 이야기를 종종 시도했었습니다.과거에도역사공부를 하려면 지구과학이나 지리공부도 잘해야..지리와 역사 2. 소백산맥의 빛과 그림자이런 글을 써왔으니 다시 이야기하면 동어반복, 자기 복제지요.그동안 짐순이는 나름 의기양양하게, 잘난척을 하고 있었어요.소백산맥, 서남해안에서 항해하기의 어려움을 떠들고선음, 전국의 19살 소녀들 중에선 짐순이가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재수업음 입자를 무한살포하고 있었지요. 어른들과는, 어느 정도 많이 돌아다니신 분들과의 대화는 좀 편해요.뭐라고 해도 다 알아들으시거든요.그러나 경험이 아직 부족..
경주에서 노서동인가 노동동인가 고분들이 모여있는 동네가 있습니다.황남대총이나 천마총이 있는 곳은 공원화가 일찍부터 이루어져나름 고분 내부의 전시도 하는데그 길 건너편에는 그냥 개방된 곳이라관광버스를 타고 오는 관광객들은 그냥 지나치는 곳이 있지요.거기엔 초창기 고대사 서술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뭐, 이것밖에 없었거든요. 그 시대에는..)금관총이나 서봉총 등의 고분들이 있습니다.해방 이후에 건드린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의 경우발굴조사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하지만일제시대에 발견된 이 고분들은 삭토가 되었지요.일제의 문화재 파괴라기 보다는발굴을 했는데 그 이후를 어떻게 복구해야할까에 대해계산이 전혀 서지 않던 초창기 고고학 자체의 한계였습니다. 1960~7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고대사, 고고학 개설에..
이런 연구라하더라도 어느 정도 학문적 자율성이 주어진 상황에서 적당히 현실과 타협한 결과라면 최소한의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북한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가 학문을 좌우하던 곳입니다. 다른 국가들이 당과 이론에 역사학을 맞추도록 강요하는 수준이었다면 부카니스탄은 아예 학설, 학문의 연구방향이 지도자에게 좌우되고, 거기에 맞지 않으면 숙청이라는 이름의 거세를 당하게 됩니다. 그냥 학계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학문적으로 잘 안팔리는 사람이 된다.. 정도가 아니라 정말 학계에서 추방, 또는 사회적으로 구축당한다는 겁니다. 사실 분단직후 남한보다 북한이 더 뛰어난 학자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인재들이 북한으로 자진해서 흘러들어갔죠. 특히나 사..
1990년대에는(짐순이가 호랑이 우유병 젖꼭지 빨던 시절) 북한의 연구성과가 물밀듯이 소개되었습니다. 북한의 공식 통사인 조선전사를 비롯, 박시형이나 김석형 등의 고전적인 연구서, 그리고 최신 자료들도 많이 나왔지요. 특히나 고고학과 고대사는 북한자료의 홍수가 매우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현장에 대한 감각은 커녕 그런 자료가 있었는가란 문제에 빠져 있었거든요. 신라나 백제사의 연구가 문자자료 뿐만 아니라 고고학 자료의 개발과 함께 타오른 것을 생각하면 고구려사연구는 1990년대 고구려 고분벽화의 소개, 그리고 직접 볼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고서야 타오를 수 있었지요.(그런게 그 시점이 지나 동북공정이 터져 너도나도 고구려사 새싹들의 양분을 앗아간 건 별개의 문제) 하여간 영인복사한 책들은 물론 정식 출판된..
뭐 삽이 군인의 친구가 된 역사는 깁니다. 어차피 대다수의 징집병은 농민이었고 아시리아(로마 공병의 원조입니다)나 중국의 선진시대까지 군인이 삽을 들었던 역사는 길게 올라갑니다. 맨날 훈련만 할 것도 아니고 전방의 방어시설을 외부 용역줘서 만들 것은 아니었지요. (물론 만리장성 같은 건 대대적인 노역 동원이 이루어졌지요) 다들 아실만한 로마의 도로건설도 다 군단병들이 한 것이지요. 아예 4세기의 군사학자 베게티우스는 병사들이 한가해지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니 계속 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베게티우스는 병사들의 주적!) 1차대전을 전후로 삽은 참호를 팔 때나 축성시의 도구에 그치지 않고 참호에서 백병전이 벌어질 때면 훌륭한 냉병기가 되었습니다. (계속 사용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날이 갈아지죠. -..
아무래도 전쟁을 읽다보면 자꾸 계량화된 것만 보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는 적을 몇 명 죽였는데 아군은 몇 명 죽었는가, 무기와 보급은 어땠는가, 이 전투가 전쟁의 향방을 얼마나 좌우하는가... 언젠가 손대볼까 했던 역사상 전투에 대한 원서를 볼 때마다 이거 맘 아플 일 없고 참 편하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어느 땐가 전쟁을 하지 않거나 져야하는 것과 이겨야 하는 것으로 구분하는 버릇도 생겨났습니다. (져야하는 전쟁은 이기면 더 많은 전쟁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학교의 건달들 만화에서 하나 깨부시면 다음 편에서 또 다른 놈이 도전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것은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맘 편한 이야깁니다. 정작 그 전쟁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필사적입니다. 영화에서 볼 때와 달..
1185년의 봄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의 막을 내리는 해전이 벌어졌습니다.단노우라 해전으로 알려진 그 해전이지요.헤이케-평씨 일문과 겐지-원씨 일문이 벌인 싸움에서헤이케는 패하고 많은 이들이 물에 뛰어들어 그들의 시대를 마감합니다.그때 헤이케 편에 있던 어린 안도쿠천황도 8살의 나이로 헤이케 여인들과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지지요.그때 천황가의 3대 보물도 따라 물 속으로 들어갔다합니다.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던 상징이 사라짐과 동시에천황의 권위가 사라지고 무사들의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그러나 이미 천황의 힘은 헤이안 중반에 이미 사라졌지요.헤이케-겐지와 마찬가지로 천황가의 후손입니다-가 권력을 잡기도 했고그 이전엔 후지와라씨가 실권을 장악했습니다.상징이 있던 없던 정치적 실권은 이미 남의 손에 놓여집니다.(..
한때 짐순이는 고대사를 버리고 미술사의 어린 꽃이 되겠어..라고 날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뭐, 외우는 걸 전혀 하지 못하는 내장 컴퓨터의 한계를 넘기 위해불상이나 탑, 목조건축의 가구 부속품의 이름을 외운 적도 있습니다.(문제는 다 잊어버린 게 문제. 양산형에게도 좋은 컴퓨터를!!)그때 국립중앙박물관의 불교미술실은 보물창고였습니다.어차피 후삼국 이후는 관심에도 없으니까삼국시대 후기와 통일신라 불상에 푹 빠져버렸지요.(물론 소녀는 궁극적으로 석탑모에였지만요..)그 때 그만 사랑에 빠져 비는 시간이면 찾아가게 했던 불상이 있습니다. 짐순이는 남몰래 미련밤퉁이란 별명을 지어주고는마치 교생선생님에 반해버린 중딩마냥부끄러운 소녀심을 전시실 충만하게 만들었지요.미려함을 자랑하는 감산사 불상도 있고삼국시대 불상하면 ..
김해에 일이 생겨 돌아다니던 시간에 한가하면 박물관과 홈플러스와 서점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보게 된 김해박물관은 짐순이에게 영향을 끼친 박물관입니다. 전시를, 아니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영감을 주었거든요. 나중에 듣자하니 국립김해박물관은 연구 중심으로 특화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유물이나 문화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전시에 대한 연구도 한다는 겁니다. 오늘 찾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앙박물관을 처음 지을 적에 춘천박물관이 시설로 베타테스터였다면 김해박물관은 전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실험해보는 곳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생각해보면요, 그동안 박물관은 밋밋하게 유물을 전시하고는 박물관 학예사와 동료 연구자들이나 이해할만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그냥 사람들은 지나칠 수 밖에 없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