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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원래 계획은 24일은 사천왕사-오사카성-오사카역사박물관을 돈다였습니다. 작년에는 오사카에 머물면서도 오사카보다는 나라-교토에서 놀았으니 이번에는 오사카도 충분히 보자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숙소를 나섰습니다. 난바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사천왕사 앞에서 내립니다. 문제는, 그러니까 이날 일정을 다 뭉개버린 문제가 여기서 발생했지요. 바로 길을 잃어버린 거. 다음날이나 마지막 날이나 얼굴이 두꺼워져 막 물어봤지만 (아니 오후부터도 잘 물어보고 다녔어요) 이 상황에선 부끄러워 물어보지도 못하고 정 반대로 한참을 걸어갔지요. 하염 없이, 하염 없이.. 저 천왕사 주차타워 간판 하나보고 저 옆에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요. 한참을 걸어가도 사천왕사(천왕사)는 커녕 인왕사도 안보이기에 겨우겨우 용기를 내어 어느..
지난 일요일에는 몽촌토성에 다녀 왔습니다. 원래는 풍납토성자리도 같이 보는 것이 계획이었으나 어찌어찌하여 풍납토성은 포기하고 몽촌만 돌았습니다. 몸상태가 그닥이어서 자세히 돌지는 않았으나 성이 가지는 본연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한정한 나들이였어요. 몽촌토성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올 겨울 특집으로 해도 모자랄 겁니다. 그런 매우 귀찮고도 어지러운 작업은 제껴두고 그냥 성을 찍은 사진만 나열합니다. 몽촌토성이 과연 왕성이냐 도성이냐 아니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어느 것이 백제의 왕성, 도성이냐를 두고 십여년 가까이 논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아무렴 어때..에 가깝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왕성이 항상 고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를 예로 들어보면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었..
10월 23일로부터 26일까지, 올해도 어김없이 정창원전이 나라박물관에서 열려 거길 다녀왔습니다. 작년엔 셋이 갔지만 올해는 혼자서, 그래서 더 좌충우돌하고 헤메고 다녔지만 재미는 있었네요. 슬슬 그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첫날과 마지막날은 오사카에서 보냈지만 가운데 이틀은 나라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니 고대사와 관련 없는 사진들이 초장부터 나와도 걍 넘어가는 겁니다. ------------------------ 23일 오후 2시 비행기라 간사이공항에 도착한 것은 4시, 수속밟고 공항에서 오사카로 떠나는 난카이선 급행열차를 타고나니 벌써 저녁이 시작됩니다. 작년에는 공항이나 전철 안에서 사진이라도 찍었는데 혼자려니 쑥스럽고 얼른 숙소라 가려 해서 사진기를 꺼낼 여유는 없었습니다. 비행기 도착 때까지 긴..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서안과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서안에서 진시황의 병마용갱과 대안탑은 보고 싶었습니다. 북경은 그닥 관심이 없었구요. 선진시대 연의 수도로서, 혹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계라는 도시라면 모를까 명청이야 그닥인 것은 전공상 어쩔 수 없군요. 서안에서 가장 기대한 것은 대안탑이었습니다. 옛 장안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건축물인 그 것을 신라의 사신들이나 끌려왔던 고구려인들이나 백제인이라면 누구나 보았겠지요. 지금 서안보다 더 큰 옛 장안의 흔적을 알려주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했습니다. 6752년에 삼장으로 유명한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여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고 제자들을 기른 자은사에 세워진 탑입니다. 고종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군요. 여기엔 불경을 보..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DJ. DOC의 신곡 하나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첫사랑이 다른 남자와 있었고, 또 그 다른 남자가 그녀와의 일을 떠벌린 것에 대해 분노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인데 디스야 힙합의 한 문화요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디스와 비교를 거부하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 개개인을 욕하기 보다 이런 노래로까지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뭐, 디스 문화가 그렇게 활성화하지 못한 대다수에게 낯 선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이하늘을 비난하는 목소리 속에는 쿨한 척하는 것이 보여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았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쿨하게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 일이 그렇게 쿨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게 자기의 현실으로 다가올 때 대체 얼마나 쿨할 것인지.. 그 점에..
언젠가 왕의 성격에 대해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순간 그 분과의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뭐랄까 왕과 군신과의 관계에서 두 사람의 개념은 크게 달랐다. 아무리 엿같은 선조의 뻘 짓에도 이순신은 반란이냐 절대적 충성이냐의 갈림에서 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고대의, 좀 더 올라가는 시대의 신하들은 자기의 세력을 통째로 들어 타국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군신의 관계라도 조선시대는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성립되었고 (물론 군권을 제어하는 신권의 장치가 있었으니 전제정권은 아니었다는 건 안다) 고대사는 좀 더 수평적인 관계였다. 귀족과 왕족의 관계는 약간 애매하게 겹쳐있었고, 왕과의 상하관계도 뚜렷하지 않았다. 신라를 예로 든다면 진평왕이 성골을 주장해 일반 왕족과 차이를 ..
몇 주 전인가 일요일 아침에 디스커버리 다큐를 한 편 보았는데 투탕가멘과 그의 아버지 아케나톤에 대한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아케나톤은 범신론이 가득했던 고대사회에 최초로 일신교의 개념을 창시한 사람이다. 그가 아마르나에서 죽자 그동안 눌려왔던 세력들이 어린 파라오를 협박하여 아버지의 개혁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나중에는 투탕가멘도 죽인다. 그것을 보다 생각난 것이 바로 현재의 이집트. 그야말로 일신교인 이슬람교를 믿는 이가 대다수가 아니던가. 이슬람의 뿌리인 유대교도 그 시작은 아케나톤에게 배운 것이니 아마르나가 버려지고 아들은 피살당해도 결국 먼 시야로 보았을 때 아케나톤은 승리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좀 전까지는 아케나톤과 투탕가멘, 그리고 이집트만을 생각해 왔는데 방금, 혜공왕이 떠올랐다. 그는 왕,..
문제의 사리봉안기, 하얀 밑줄이 문제의 대목, 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 백제 왕후는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이다. 출처 : 09년 1월 19일자 문화재청 보도자료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사리기의 발견으로 좀 뒤숭숭하더니 급기야 이런 신문기사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090121162214723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jeolla/view.html?cateid=100009&newsid=20090121162214723&p=yonhap 사리기의 출토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나니 당황스럽기보다는 통설과 다른 논지들이 떠오르더군요. 많은 학자들이 무왕설에 지지를 보냈지만 뭔가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100413070210444&p=yonhap 오늘 아침에 매우 흥미로운 뉴스가 히나 나왔습니다. 백제시대의 마약조달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제목의 뉴스죠. 매일 왕과 귀족들의 정쟁,(사실 이것도 당시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겠다는 방향의 논쟁입니다) 쉬지 않고 치고박는 전쟁 얘기나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겐 솔깃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1년을, 평생을 살아갔는지에 대한 자료는 희소한 상황이니 말이죠. 과연 백제에도 마약이 있었는가.. 마약이 결코 좋은 물건은 아니겠으나 그 시대에도 있었는가는 흥미로운 것입니다. 그럼 한식산/오석산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을 먹었는가에 대해 기..
서양사 수업에서 신문화사를 배울 때 기말과제물로 낸 것이 안악 3호분의 행렬도 분석이었다. 벽화에 그려진 병사들에 대해 분석하고 이 병사들이 행진하는 그림 뒤에 숨겨진 당시 군사제도의 변화상을 잡아낸...답시고 주절거렸다. 그땐 석사논문 주제로 잡지 않은 주제에 이걸로 박사 쓸꺼라고 다녔다. ( 왜 후배들의 우행에 태클걸지 않는가.. 지는 더했으니까!) 4세기대의 고구려의 군사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한마디로 국가 공권력으로서의 군대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군대는 부(部)라는 지역공동체의 장, 또 국왕이 거느리고 있던 혼성적인 조직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되기 시작하면서 군대는 국가의 공적 무력으로 탄생하게 된다. 전면적인 징집으로 바뀌게 되어가는 것..
지난 금요일 횡성에 있는 독립운동유적을 조사하던 차에 어여쁜 신라 석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 탑이 서있던 곳은 갑천면 중금리였으나 횡성댐이 건설됨에 따라 중금리가 수몰지역에 포함되어서 현재의 위치, 망향의 동산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수몰지역 출신자릉 위해 횡성호반에 망향의 동산이 세워지고 기념관을 두게 됩니다) 현재 이 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1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강원도내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쌍탑형식입니다. 1974년에 해체와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기술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는지 금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주 매끈하고 흰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채워넣은 부분입니다. 그냥 보시면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으나 일제시대에 이 탑을 반출하려다 실패한 이후 탑이 많이 훼손되었기에 ..
8월 25일은 볼 것이 많았습니다. 24일글을 3편으로 나누었는데 25일은 5편 이상은 끌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지온은 10년은 싸울 수 있다던 님께 묵념.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망했자나요!) 오늘은 볼 것 투성이인 집안의 유적들을 돌아보기 전에 예열한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짧게 나가겠습니다. 밤에 집안으로 들어와 도시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기회는 없다시피 했습니다. 몇몇 분들은 발마사지도 받으러 가셨지만 워낙 오녀산성에서 흘린 땀이 많아 빨리 씻고 싶은 맘 밖에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변방 중의 변방인지라 몸조심도 해야한다는 말이 심야산보를 막았습니다. 뭐, 한밤중에도 길 전체가 공사중인데다 밤에 문을 여는 곳도 없으니 마땅히 할 일도 없지요. 왜들 그렇게 한국의 밤문화, 밤문화..했는지 ..
할 이야기는 다 한 관계로 오늘은 사진 몇 장 올리고 몇몇 이야기나 하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주말엔 쉬고 싶습니다. (사실 못쉬었습니다. 일하느라) 환도성을 내려오는 길, 너무 아쉬운 게 많아선지 아님 환인호를 보고 마음의 긴장이 풀린 것인지 촛점이 잡히지 않네요. 너무너무 떨고 있었습니다. 뭐, 내려가는 길만 봐도 성곽고고학 전공을 선택하지 않은 자신이 사랑스러워졌습니다. (나르시즘? 아놔 -_-;;;) 어쩌다 마주친 그대..도 아니고 계속 만나는 주거지. 그래도 ㄱ자형이 잘 남아있어서 또 담아보았습니다. 원래 온달 전공이래서 온돌 사진에 광분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 성을 내려가기 전에 만난 오녀산성의 동문, 성문이라 해서 숭례문이나 흥인문 같은 반짝반짝하는 성문만을 생각사시는 여러분께 락커 문군이 ..
RGM-79는 첫 날 화를 냈습니다. 대련에서 단둥으로 가는 길목에서 산이 별로 없고 지평선이 보이는 광경을 보며 외쳤지요. '어떻게 산이 병풍처럼 시야를 가로 막지도 않아. 이거 불법이얌!' 눼, RGM-79는 강원도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틀 째부터 신이 났습니다. 왜냐고요? 바로 고향산천 복사한 듯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 홍천군의 산길을 헤메고 왔기에 너무 익숙한 풍경은 맘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음식만, 그러니까 그 놈의 오향만 아니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간체만 아니면 푹 삶은 듯 머물러도 향수병은 걸리지 않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죠. 자꾸 고구려하면 드넓은 벌판에 말달리고 활쏘는 것부터 상상하시는데 실제로 고구려인들은 산에 사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사진을 찍는 감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긴 사진을 찍은지 5년 가까이 되다보니 머얼리 머얼리 안드로메다 관광여행이라도 떠났나봅니다. 말도 사맛디 아니한 듕궉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무는 걸 바라보는 오자서의 심정으로 찍었습니다. 그러나 찍은 사진이 많은 이상 두 차례에 걸쳐서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4일은 환인현의 오녀산성을 방문하였습니다. 비사성이야 오토바이로 올랐지만 오녀산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계령은 RGM-79에게 오지마라, 내려가라 하지만 이놈의 산은 거부하질 않는군요. 제발 출입거부 명령 좀 내려주시옵소서.. 일행들에게 산은 멀리서 보는 것이지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항변하였지만 결국 끌려끌려 올라갔습니다. 첫날 밤을 보낸 단둥시의 호텔 앞 ..
RGM-79는 지난 8월 23일부터 27일까지 4박 5일로 듕궉 동북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대련-단동-통화-집안-백두산-장춘을 거쳐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을 돌아보았는데 역시나 RGM-79에게는 고구려 유적이 더 중요하였죠. 새 글 쓰기는 귀찮고, (눼, 귀차니스트 맞습니다) 사진 정리도 늦어졌고 이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건 역사상 유래 없는 초광속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직 책상 위에 6년 전 현상안한 필름통이 굴러다닙니다. -o-) 맨날 유물이나 유적사진만 찍는 통에 여행을 떠나 찍는 센스는 극악이지만 한 번 공개는 해볼까합니다. 오늘은 첫날 사진을 올립니다. 대련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기 위해 들렀던 대련시내의 한인 거리.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듕..
펄펄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 - "삼국사기"13, 고구려본기 1, 유리왕 3년조 고구려 초기사는 백제나 신라와는 어딘지 다른 색채를 보여준다. 우선 백제나 신라가 소국단계에 머물며 각기 마한과 진한지역의 패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칠 때, 이미 중국에까지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나 신라의 기록들이 이때도 대단했다고 말하듯 왕-귀족(신하)-백성의 '세 위계'가 체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고구려의 그것은 좀 다르다. 왕뿐만 아니라 왕자나 귀족들의 행위가 다양하게 그려진다. 왕자는 가만히 왕실의 수나 채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간다. 때론 차대왕 신성처럼 뭔가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개 그러한 행동이 돌출행위가 되어 탄압을..
오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 학부 답사준비 세미나에 갔다 왔다. 답사자료집에 들어갈 내용을 미리 점검하는 자리인데 거기서 재미있는 발표가 두 건 있었다. 그중에서 불국사와 석굴사(석불암)에 대한 발표에서 의문점을 던졌는데 두 절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 일개 귀족이 고작 부모를 위해 짓는 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신심이 강하다한들 불상이나 조성하는 정도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하면 그 건 틀린 생각이다. 먼저 불국사와 석불사가 아무리 위대한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할만큼 중요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문장을 두 절의 가치가 없단 말로 오해 말기를 바란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절은 황룡사나 사천왕사, 흥륜사 등의 '성전'..
간만에 전공개설서를 다시 읽어보니 고구려의 조세제도에 대한 부분의 여백 위에 "무분별하고 과도한 수탈 →인두세적 조세 →재산세적 조세징수"라는 메모가 적혀있었다. 아마 나름대로 흐름을 정리한 것 같은데 그 조세의 발달에 대한 내 인식에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발견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의 조세는 국가체제의 발전에 따라 합리화의 흐름에 따랐는가? 정말 과거 전근대사회의 조세제도는 무분별하고 과도했던가? 고려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는 내 전공도 아닐뿐더러 갈수록 복잡하게 변해갔으므로 우선 범위를 고대라는 시점, 그중에서 삼국시대로 한정해서 보기로 하자. 이 시기의 조세의 본질은 '규모'라는 한 단어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종전에는 족장族長, 호민豪民 등 공동체에 기반한 지배자들이..
1.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사에서 위만衛滿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일단의 중국인으로 이 땅에 한의 식민지를 건설한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그에 반발로 연에 끌려갔다가 대탈출을 감행한 모세와 같은 인물로, 아니면 남월南越의 조타를 모델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중국에서 조작한 가공의 인물로 그려졌다. 재야학자들에게는 그저 조선제국의 혼란을 틈타 서쪽을 잠식해 나라를 세운 변방의 패역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암묵적으로 그의 조선은 그전의 조선과 따로 보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듯 하다. 여기서는 그의 출신과 그가 조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가 세운 나라의 성격, 그와 동시기에 유사한 왕조를 세웠던 남월의 조타를 살펴보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