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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어제(26일)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서 중요한 현장설명회가 있었습니다.(현장설명회는 발굴조사 후 학계 관련자와 언론에 발굴조사 결과를 공개하는 중요한 행사입니다)사적 제426호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 발굴조사 중에 신석기 시대의 밭 유적이 나온 것입니다.여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어제 방송, 오늘자 일간신문에 상세히 보도되었으므로 자/세/한/설/명/은/생/략/합니다.첨부화일로 문화재청 보도자료를 올리니 이걸로 읽으시길 바랍니다.물론 현장에서 기자들이 조사원의 설명을 듣겠지만어제 오늘, 언론기사의 기본은 이것입니다.오늘자 중앙일보 기사도 링크 겁니다.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582149&cloc=joongang|..
위의 목판은 가가군(이시카와현 가호쿠군 스바타쵸)에서 관할 마을에 내려보낸 명령서입니다.현재 이시카와현은 옛 가가국과 노토국이 합쳐졌는데(레이디 가가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이 목판은 가가국지역에서 발견된 겁니다. 율령제하면 잘짜여진 국가의 통치체제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중앙정치제도라던가 지방행정구역, 군사제도와 같은 행정기구만을 떠올리기 쉽죠.그러나 실상은 황제의 지배를 백성 하나하나 빠짐없이 전달하는 것입니다.관리들만 잔뜩 모아둔다 한들 그것만으로야 비누하렘에 불과하지요.(이조판서, 등짝을 보여주시오. 즈~은하, 승은~이 망극하여이다~~~~.. -_-;;;) 통일신라를 다루는 수업을 할 때마다지금의 북한을 생각하라고 합니다.5호담당제니, 거주와 이동의 제한, 직업이나 생산, 생활전반에 대한 국..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131715&cp=du 한 10년전인가 고구려에 대한 세미나가 있어서 모 학회 행사에 간적이 있습니다.갔더니 학생급은 하나도 없이 전부 원로급들만 있어서 짬에 따라 맨 앞에서 모든 발표를 들어야 했죠.졸지도 못하고, 토론시간 되니 제일 만만하다고 녹음기주며 녹음하라 그러고(여담이지만 그 학회 행사는 단행본으로 항상 묵직하게 나오는데 그날 세미나 분량만 토론녹취가 생략되었습니다. 녹음기를 잘못 만졌나봐요...) 그날의 모든 발표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이 부여의 위치에 대한 발표였습니다.고고학하곤 담을 쌓은 인간이 제일 인상적인 게 뭐였냐면고구려의 뿌리인 부여가 길림성에 있나, 흑룡강성에..
1980년대였나 일본의 학자들이 백두산의 분화가 발해멸망의 배경이라는 설을 발표했습니다.그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그 당시의 과학상식으로야 황당무개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입니다.그 이후로도 발해의 멸망원인으로 거란의 대두와 위협,그리고 발해 내부의 정치적 내분을 드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이 글을 쓰는 저도 국가 멸망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내부 분열이라고 보는 편입니다.실제로도 내부가 안정적인데 순수한 외부 충격으로 쇠망하는 국가의 예는 없습니다.압도적인 서양 무기에 굴복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정치체로 반론할 수 있겠지만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잡한 내정 문제가 얽혀있습니다.하다못해 피사로의 2백명에게 8만 석기시대 병사가 패한 잉카제국도내분상태에 처해있었고, 많은 이들이 피..
학교에 가면 회사인간이라고 구박받고(저번엔 대체로 국가와 연관된 일을 하는 80년대 선배들 앞에서'나 홀로 사기업종사자로소이다..라고 개겨보기도 했습니다 -_-;;;)회사에선 아직도 학교 사람같다고 놀림을 받습니다.그래서 기획서를 쓰더라도 학교에선 너무 사회틱해,회사에선 뭐 연구프로젝트 기획서냐 합니다. 마침 율령제와 관련된 정치제도를 건드리고 있고지금 회사도 율령제 도입 전후의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수년째 일하고 있는 회사는 들어갈 즈음에도 아주 작진 않았지만어느 정도 부족국가(80년대 들어 맥이 끊긴 용어입니다. 알면 연식인증;;;) 분위기였습니다.자유도가 매우 높고 각각 알아서 움직일 수 있었달까,그러다 요즘은 사무실 인원이 늘어나고,임기응변이 가능하던 조직이 뭔가 체계란 게 생겨난달까처음부터 여기..
아주 오래간만에 학교에 갔습니다.집 위가 학교인데 서울서 돈벌이를 하다보니 퇴근하면 10시라,그리고 서울서 자는 날도 많아 시간이 별로 없죠.하여간 간만에 바쁜 후배놈과 논문 얘기를 신나게 했습니다.조교일을 너무 잘해 업무에 치여사는데다(워낙 잘해 너도나도 시키는 통에 직속선배랍시고 일 시켜본 적 없습니다)결혼을 했고 애가 태어나는 여러 일을 거쳐 한참 전에 나왔어야 할 논문이 몇 년째 중단되었지요.그런데 책상을 보니 간만에 사료들이 펼쳐져 있어서(하도 바쁜 터라 말 걸기도 힘듭니다)요즘 공부 하나 싶어 말 걸었더니 신나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해줍니다.처음 줄기 잡을 때도 매우 기대하던 논문인데 오늘 들어보니 찌릿합니다. 그 중에서 중국 자료를 그동안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해석했다는 걸 밝혀낸 게 의..
맨 처음 시작은 오후에 덥고 졸려서 나꼼수 기사를 읽으면서부터였습니다.벙커1인가 뭔가를 만들었다길래 검색해보니 사무실에서 가까운 것 같아 (버스로 3정거장인가 그렇습니다)지도를 찾아보니 벙커1 바로 옆에 단골 출판사 이름이 뜨길래여기가 거기 맞나 싶어 검색하기에 이르렀습니다.간 길에 인사 드리고 책이나 몇 권 사야겠다 싶었는데바로 며칠 전에 나온 전공서적들이 눈에 띄더라구요.그 중 하나가 통일신라의 율령제였습니다. 조만간 거기 가서 목아돼 싸인이나 받아야지..로 가득차던 머리가순간적으로 전공자의 두뇌로 전환조치 되었습니다.(눼, 목아돼, 조, 좋아합니다. -_-;; 뒤에서 프로듀싱에 전념하겠다는 마인드가 맘에 들어서요)머리 속은 당장 출판사로 달려가 얼른 그 책을 쟁취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더군요.원래 끌..
"자료가 없다" 한국고대사만 그런 소릴 하는 게 아니다.어느 나라던 고대사 전공자는 저 말을 달고 산다.문자 자료가 넘치는 중국과 로마도, 약간 적당히 있는 우리도,문자가 없이 극소수의 고고자료에 의지해야하는 어떤 나라도고대사 전공자에게 자료가 부족하단 말은 만국 공통어다.아마, 역사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국가의 모든 언어로저 문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오죽하면 고대사 전공자는 굉장한 천재거나 바보임에 틀임 없다는 말이 있으랴.(아마 범인은 중세 이후 전공자일 것이다. 위 말도 만국 공통어다) 석사논문을 쓰고나니 구비문학을 전공하는 다른과 선배가'거짓부렁은 내전공인줄 알았더니 니가 진짜 거짓부렁하는구나'란 말을 했다.이건 국문학도들이 고대사전공자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라고 생각한다.하긴 맞는 ..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
경주를 그렇게 좋아해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은 고구려 후기 수도였던 평양성이었고 그게 불가능해서 대신 부여에 애정을 쏟았고 반면에 경주는 그냥 가는 곳.. 이런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서안을 가게 되고 나라를 방문하게 되면서 경주에도 관심이 생겼달까요. (요즘, 선배는 통일신라로 전향해 광명찾으라고 하고, 후배는 전공바꾸셨어요라고 묻습니다) 작년에 총알부족도 있어서 나라에서 열리는 정창원전을 가지 못한 아쉬움과 개인적인 일이 겹쳐 경주를 찾게 되었습니다. 마치 떠나는 날의 감상같은 서문은 집어치우고 다시 포석정으로 돌아갑니다. 포석정은 그저 경애왕이 나라의 위기에도 정줄놓고 술쳐먹으러 가서 놀다가 나라를 말아먹고 자신도 죽은 역사의 무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 그게..
2박 3일의 일정으로 경주에 왔습니다. 일정은 크게 정해진 건 없고, 개인적으로 안압지와 경주박물관만은 보고야 만다..만 확정입니다. 원래 여행이란 건 시간단위 일정을 짜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정말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입니다. 우선 오늘은 오릉, 나정, 포석정, 감은사와 감포를 오갔습니다. 전철 하나를 놓친 끝에 서울역에서 열차를 1분차이로 놓치고 다음 차로 점심 때쯤 신경주역에 도착했습니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나가서 버스를 기다리다 택시를 타고 찾아간 오릉. 이건 동행인의 강력한 요청탓인데 사실, 신라의 상고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답사때도 여길 온 게 10년 전 한 번뿐이지 싶군요. 오릉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 거서간(박혁거세)의..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기왕(岐王)의 집에서 항상 그대를 보았고 최구(崔九)의 정원에서 노랫소리 몇 번을 들었던가 지금 이 강남은 한창 좋은 풍경인데 꽃 떨어지는 시절에 다시 그대를 만났구려 ---------------------- 기왕 : 당예종의 넷째 아들로 현종의 동생이기도 한 이범 최구 : 최척. 구는 최씨집안의 항렬에서 아홉째라는 뜻. (번역은 김원중 역, "당시감상대관", 까치, 1992, 37쪽에서 따옴) 두보가 젊었을 시절에 기왕과 최구의 집에서 만나던 이구년을 강남에서 만났다. 한 명은 필명을 날리던 문사였고, 한 명은 노래 하나로 알아주는 가수였다. 안록산의 난을 맞이하여 이리저리 헤메고 다니다 강남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아,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데 우리들의 신세는 화..
요즘 가장 관심있는 일은 논문을 쓰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시각적으로 간결하게 보여줄 것인가입니다. 아무래도 책상머리 앞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가르치는 시간이 더 길어서 그럴껍니다. 일전에 소개한 골품제 그림처럼 한 눈에 보여주는 걸 좋아합니다. 한때 교재로 쓰려다 말았던 책이 있는데 (결국 직접 만들어야 했습니다. 뭐, 결론적으론 도움이 되었지만) 여기에 실린 그림 하나가 ㅎㅇㅎㅇ거리게 뿅뿅가게 만들었습니다. 주경식, 백유정의 "한국사 흐름 따라잡기"라는 책입니다.(휴머니스트, 2002) 삼국시대의 각각의 국가적 성장과 흐름을 아주 간결하게 만들었는데 나름 핵심적인 내용을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의 전성기 를 표현한 그래프에 대해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RGM-79의 관점에서는 이..
올 초에 공산성에 갔을 적에 공산성 내 공북루쪽의 성안마을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백제의 갑옷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갑옷은 가죽 찰갑이며 옻칠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최고급인 제품이지요. 저수시설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발굴된 것을 보니 습기 덕분에 명문같은 것이 잘도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가죽부분은 사라졌고, 그 위를 두껍게 덮어쓴 옷칠 부분만 남았습니다. 갑옷에서는 아래와 같은 명문이 있습니다.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정관 19년이라는 연대입니다.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로 19년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645년입니다. 이 갑옷이 언제쯤 만들어졌느냐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적어도 이 것이 누..
쇼토쿠태자(574~622)가 세운 시텐노지(사천왕사四天王寺)는 일본 고대사의 중요한 무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587년 일본에서 불교의 도입을 둘러싸고 모노노베씨와 소가씨가 싸울 적에 불교도입을 주장한 소가씨의 편에선 태자가 사천왕에게 기원을 한 후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언젠가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요) 소가 우마코가 세운 아스카데라(비조사飛鳥寺)와 함께 일본 최초의 사원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천왕사에선 쇼토쿠 태자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요. 잠시 쇼토쿠태자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요메이천황(용명)의 아들로 우마야도라고도 불렸습니다. 고모인 스이코천황(추고)이 즉위하자 당대의 실력자 소가 우마코와 연합하여 섭정으로 활동합니다. 603년의 12관계 도입, 604년의 헌법 17개조를 반포했고..
무언가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침받이를 해야할 정도로 질질 흘리죠. 제작년에 오사카의 중고서점에서 3일만에 읽는 일본사인가 하는 책을 샀는데 거기에 헤이안시대의 신분구조를 다룬 표 하나 때문에 일본글을 모르는데도 샀습니다. (귀국해서 그 책 번역본이 오래전에 나온 걸 알고 또 샀죠..) 신분제는 유달리 도표가 효과적인 장르(?)입니다. 각종 신분 규제라던가, 상승제한선이라던가, 각 신분별 인구분포라던가, 소유가능한 재산이라거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 하나가, 표 하나가 더 쉽게 들어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나온 책에서 기가 막힌 그림 하나를 발견했죠. 대교 소빅스에서 나온 "우리문화탐험"의 17권 '선사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신분제도'의 한 장입니다. 사실 어린이 역사책이..
1. 7세기 후반 고구려사의 아이콘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7세기 후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절대 빠질 수 없는 일이다. 관심을 쏟고 있는 6세기에 비해 사료도 많고(문헌기록과 묘지명..) 사건도 별별 것이 다 일어나고 있으나 그를 이야기 하지 않고 7세기 후반-멸망기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근 100년 가량 활활 타올랐던 전시상태의 결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아예 연개소문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기나 하나 만약 그런 연구자가 있다면 용자거나 바보거나.. .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일부에서는 그를 매우 남자답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영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좀 신중하게 접근하는 쪽이다. 그의 집권이 고구려 귀족사회의 원심분리적 이탈을 가속시켰다고 보기도 하고 신라를 친당외교로 ..
http://media.daum.net/digital/view.html?cateid=1050&newsid=20110427160031167&p=akn 미야자키 이찌사다의 "옹정제"의 말미 역사 후기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미야자키와 일군의 연구자들이 모여 옹정제가 남긴 방대한 문서들을 읽고 정리하는 기나긴 시간. 누군가 이거 지겨운 거라고 투덜거렸더니 어느 한 사람이 그랬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학문이다" 그냥 읽어보면 고작 이거 말할라고 그 난리를 피웠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학문이 반드시 아주 대단하고 신기한 것만 다루고자 한다면 그건 이미 항문이 된 지 오래된 후의 일일 것이다. 틀렸더라도 그게 왜 틀린 것인지, 맞아도 왜 그게 맞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학문이다. 이 기사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삼..
천무천황의 손자이자 고시황자의 아들인 장옥왕(나가야왕, 684?~729)은 어느 날 자신의 저택에서 신라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한 수 읊습니다. 높은 가을 하늘에는 멀리 석양이 비치고 먼 봉우리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다. 금란과 같은 굳고 친밀한 교류를 사랑함이니 청풍명월의 자리에서 피로한 줄도 모른다. 계수나무 행기로운 산에 머무는 석양빛이 발하고 국화 향기로운 포구에는 낮게 펼쳐진 저녁놀이 선명하다. 일본과 신라 사이가 푸른 물결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 말게나 언제까지나 연석에서 무르익은 사념은 시로 풀어 버리세. - 사호의 저택에서 신라손님을 위해 연회를 열다. 다른 시의 주를 보면 이 시는 726년의 가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과의 교류에서 통일 이후 공식적인 관계가 단절되는 77..
어느 조선시대사 분이 그럽디다. 10년마다 여인네들 옷 매무새가 달라진다고.. 유방의 노출의 폭이나 치마길이 등에 변화가 있다는군요. 끽해야 4색당파마다 특색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뭐, 솔까말 조선시대 전공도 아니고 복식사도 아니니 봐도 그게 그거 같습니다. 신라의 사신이 전진의 부견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죠?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그처럼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357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안악3호분의 부인벽화입니다. 나중에 보여질 그림들에 비해 한국색은 거의 없는 얼굴과 옷매무새로 동시대인 전연의 여러 벽화고분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에서 보여지는 고구려에 거주한 여인의 첫 그림은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