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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결혼을 못하는 남자의 원판으로 잘 알려진 배우 아베 히로시가 나온 영화가 나왔다.란이나 망국의 이지스로도 알려지고 구로자와 아키라가 가장 사랑했다는테라오 아키라와 함께 연방의 폭죽을 ㅎㅇㅎㅇ거리게 하는 몇 안되는 일본 배우인데가끔 괴랄하게 나오더만 이번엔 정말 뒤통수를 쳤다.어떤 의미로는 노다메 드라마판의 미르히 홀슈타인에 버금가는 역할이다.(미르히역의 다케나카 나오토보다 웃기지는않지만)로마를 다룬 영화에 로마인으로 나와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일설에는 혼혈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실제론 아니라고 함) 테르마이 로마이 テルマエ・ロマエ Thermae.Romae.우리 말로 바꾸자면 로마의 목욕탕?목욕탕이 위생시설과 사회문화센터의 역할을 모두 담당하던 시절,(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중 가장 괜찮은 10권에..
오래전부터 책을 만들자는 이야기는 있었습니다.한참 글을 많이 쓰던 때였고, 또 그 때 글이 지금보단 낫습니다.그때도 그런 말에 거부를 해왔습니다. 병약한 미소녀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마음의 그릇이 철철 넘칠 때야 쓴다는 것이라순간적인 판단으로 움직이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합니다.원래 삼국지도 아주 아주 천천히 군비랑 인재 축적을 한 다음에야 몰아치는 성격이라선을 그어 놓고 거기에 충족할 때까지 안움직입니다.어떤 글은 제목 잡고 두어달 머리 속에서 굴리다가 길에서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적도 있습니다.어떤 것은 2년 넘게 자료만 머리 속에 쳐넣다가 아침에 노트북 켜고 저녁까지 쓴 적도 있습니다.맨 먼저 희미한 선으로 범위를 정하고 한 부분 한 부분 차근차근하게 마치 블록을 쌓듯 글쓰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본격적으로 고구려사 이야기를 함에 앞서서과연 어떤 토양에서 자랐길래 고구려가 그런 역사를 가지게 되었느냐는 이야기를 먼저해야 합니다.과거 제국주의 시절에 백인들이 자기들의 우월함을 환경결정론으로 수식을 했었죠.그것은 결국 피압박민의 역사에도 적용되어 이런 환경에서 컸으니 이 모양이라식민지배를 받는 게 앞으로의 역사에 도움된다는 ‘걸왕의 개가 짖는’ 소릴 했다지만역시나 역사적 진화에 있어서 환경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환경이야기를 함에 있어 과거 제국주의 합리화 논리가 아니라재레드 다이아먼드의 “총ㆍ균ㆍ쇠”처럼 ‘인간이 환경에서 거둘 수 있는 자원은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봅니다.왜냐하면 꼭 그 환경이라고 그렇게 흘러간다는 공식은 전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건국기의 자연환경..
어제 '그것은 알고 싶다' 4,5회분이 한꺼번에 올라와 자기전까지 그걸 다 듣고박정희소사전 2는 오늘 아침 나오면서 들었다.거기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는데박정희가 뭘했느냐는 현대사 연구자들은 다 아는 거고딱 깔만큼만 깐다는 말이었다.세세한 이야기는 몰라도 어지간한 건 알고 있었는데오늘 아침따라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사실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해야할 매우 중요한 마음가짐이다.어차피 100% 선인이나 악인은 없다.그리고 공업과 과실이 10:0으로 간단하게 기우는 일도 없다.그래서 박정희든 원균이든, 아니면 그 흔한(?) 야구 원로감독들을 평가할 때도 그렇다.그런데 이게 잘못하면 어느 한쪽이 문제가 아니라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다.모두가 역사가는 아니고 역사가의 시선으..
원문山上王 諱延優 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也 魏書云 "朱蒙裔孫宮 生而開目能視 是爲太祖 今王是太祖曾孫 亦生而視 人似曾祖宮 高句麗呼相似爲位 故名位宮云" 故國川王無子 故延優嗣立 해석산상왕의 휘는 연우이고 또는 위궁이라 하며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위서에 이르기를 "주몽의 후손 중에 궁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태어나면서 눈을 떠서 볼 줄 알았다. 그가 바로 태조(왕)이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으로 또한 나면서 볼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증조 궁과 같다고 여겼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일러 위라고 부르니 고로 이름을 위궁이라 한다"고 하였다. 고국천왕에게 아들이 없어서 고로 연우가 뒤를 이었다. 동천왕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의 아버지인 산상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비록 국사책에 나오지 ..
"온달과 온군해는 중앙아시아에서 왔다" 지배선 선생님이라면 모용씨의 연만 가지고 평생을 파신 분입니다.특히 국내에 몇 분 되지 않던 위진남북조시대 전공자시기도 합니다.(요즘은 좀 늘어난 것 같군요)이분의 연구는 4~5세기 고구려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것이기도 합니다.아무래도 미천왕대부터 장수왕대까지 전연~북연까지 이르는 이 국가군國家群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나중에는 고선지에 대한 연구성과도 남겨주셨지요.특히 이 분야에 대한 책은 거의 없던 상황에서 매우 귀한 가치를 갖습니다.(당장 떠오르는 다른 자료래야 룩 콴텐의 유목민족제국사-민음사, 대우학술총서-에서 약간,수잔 휫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이산, 2001- 정도?)다만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란 괴랄한 결론의 책도 있습니다만(탈..
지인들 중에는 역사학 전공자보다 고고학 전공자가 많습니다.석기랑 토기랑 뒹굴링도 오래 하고 그랬는데도(쿠라시나 카나 이전에 먼저 굴렀어요)매번 볼 때마다 외계문물을 보는 것 같습니다.고고학 논문은 아예 외계 문헌이라고 하죠.그래서 국가형성에서 이론 쪽은 좋아해도 세부 각론은 하나도 모릅니다.정말 모릅니다.이 간단한 정리를 기획하며 되도록 문헌사적 정리 위주로 가자고 했는데한 열 편이면 고구려사 글 나오겠지..라고 했는데아뿔싸!! 프랑스 비웃으며 베트남전 참전한 미국애들 심정이 딱 지금 이해됩니다.아무리 문헌사쪽 이야기만 하자고 해도 건국 환경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데문제는 정말 솔직하게 자연환경이라면 모를까 고고학적 환경은 하나도 모른다는 것!(내가 괜히 후기사 전공하는 게 아냐!!!!!) 다음 주쯤이면 ..
지난 주말 처음으로 동묘 앞에 갔다왔다.정확히는 거기의 옷 매장을 찾아간 것,10년을 입은 미군 야상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새걸 사러갔다.동묘는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앞만 지나쳤는데, 뭐, 그게 어쨌단 말이냐.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니 그날 들여다보지 못한 사당의 주인인 관우가 생각났다. 다들 관우를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장수중 하나다.삼국지를 하다 잡히면 어지간한 경우 아니면 닥치고 참수하는 경우랄까.(다만 애로사항이 로리콘장비도 같이 베어야 한다는 것)그는 일개 무사로서는 훌륭할 지 모른다.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중요한 책임인 형주를 맡았을 때그의 실책은 의형 유비의 패업 자체와3국분립의 안정을 깨뜨려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물론 유비가 이릉이라는 가장 큰 악수를 두었지만)평소에도 성깔이 드러..
원문三年秋七月 王田于平儒原 白狐隨而鳴 王射之不中 問於師巫 曰 "狐者妖獸非吉祥 况白其色 尤可怪也 然天不能諄諄其言 故示以妖怪者 欲令人君恐懼修省 以自新也 君若修德 則可以轉禍爲福" 王曰 "凶則爲凶 吉則爲吉 爾旣以爲妖 又以爲福 何其誣耶" 遂殺之 해석가을 7월 왕이 평유원에서 사냥을 할 적에 흰 여우가 따라오며 울었다. 왕이 그것을 활로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무당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여우란 것은 요망한 동물로 상서롭지 못한 것입니다. 하물며 흰 색이라면 더욱 괴이할 따름입니다. 그런즉 하늘이 능히 고운 말로 타이를 수 없기에 요괴란 것으로 보이고자 하는 바는 임금님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여 (자신을) 성찰코저 하는 것이니 스스로 새로워지란 뜻입니다. 임금님이 만약 덕을 쌓으시면 즉 가히 화가 복으로 바뀌는 ..
사실 가장 원초적인 종교의 형태 중 하나가 바로 무당의 존재입니다.무당에는 크게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습니다. 사회의 규모와 복잡성에 따라 간단한 사회는 세습무, 복잡한 사회는 강신무가 주를 이룬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세습무는 마을 동제의 제사진행자처럼 그때그때 임명됩니다.주로 집안의 가장이나 민속학 용어로 '시절이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맡습니다.아무 권한도 없고 신이한 능력도 없습니다.그저 그날 제례의 대표로 나와 초월적인 존재와 대화를 시도합니다. 우리가 무당하면 떠오르는 분들은 거의 강신무라고 합니다.말 그대로 신이 강림하여 신이한 능력을 받은 무당을 말하지요.이들은 전문적인 종교직능자로 특별한 신과의 감응에 의해 선정됩니다. 두어다리 건너 무당이 되신 분이 계신데그분도 멀쩡히 사회생..
요즘 거의 거지가 되어버린지라 가급적이면 서점에 안갑니다.가봐야 마음만 아프고, 때로는 출혈도 크니 그냥 매달 보는 잡지디펜스타임즈, 밀리터리리뷰, 뉴톤 정도만 구입하는 중입니다.그러다 퇴근길에 서점 들렀다가 얼마전에 나온 수당고고학 책 들춰보고는당장 안사도 죽진 않을꺼야..라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던 찰나에아주 흉악한 책이 눈에 들었습니다.아놔. 왜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거야.. 당의 역사가 유지기가 쓴 사통이 번역되어 나온 겁니다.다들 사학과에서는 서양사하는 분들이 역사학개론 등을 가르치는 것이 싫었는데(솔직한 심정으로는 누구는 이래 말했다, 누구는 저래 말했다며 인용만 하는 게 싫고전혀 다른 진화의 길을 걸어온 사회에 대해 마치 비정규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싫고..이거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괴랄..
이기백 외, 『한국고대사론』한길역사강좌 12, 한길사, 1988. 이미 절판된지 오래고 중고로도 찾아보기 힘든 이 책이 여전히 소중한 이유를 들자면70년대부터 여러 곳에서 공격받던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이 그래도 대중과 함께 하겠다는 증거임이 첫째고70년대 접어들면서 양과 질적으로 팽창한 학계가 드디어 식민사학을 장례지내는 선언적 의미가 둘째입니다.어떤 분들은 아직도 한국고대사학계는 식민사학에 지배받는다고 욕을 하긴 합니다만분명 5,60년대는 여전히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 거리던 땝니다.일본은 자국연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연구라는 틀이 잡혀 7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한국인의 연구성과보다 더 많은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 누가 감히 돈도 안나오는 풍월 놀이를 할 수 있겠습니까.그 당시 공부..
http://mirror.enha.kr/wiki/%EC%82%BC%EA%B5%AD%EC%82%AC%EA%B8%B0- 원래 이거지만http://rigvedawiki.net/r1/wiki.php/%EC%82%BC%EA%B5%AD%EC%82%AC%EA%B8%B0 - 외부링크는 이걸로 해달라니... 한동안 베스트 아니메에 의존하던 애니정보를 사이트 맛가는 바람에위키로 갔다가 요전에 엔하위키로 바꾼 다음혹시나 싶어서 삼국사기를 쳐봤다가 매우 재미난 결과가 나왔습니다.여기야 원래 김부식 빠수니 블로그니까 그러려니 하지만보통 웹 상에선 김부식과 삼국사기의 인기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좀 등판이 잦은 경우 까기 한 게 많죠.아님 간략히 자료인용에 그치는 경우지요.그래서 여기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 봤더니 오히려 어지간한 ..
고구려, 고려.처음에는 고구려高句麗라고 불리고, 대개의 경우 초기 문헌에서는 麗자에 부수 마馬가 더 붙은 高句驪로 불립니다.요건 한때 삐친 츤데레 왕망이 하구려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게일부러 국호의 일부를 짐승이름 글자로 바꾸어 부르던 호칭입니다. 장수왕 대로 내려가면 가운데 구자가 사라진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 정착됩니다.네, 왕건이 건국한 그 고려라는 이름의 원전이기도 하죠.(그래서 고려사 전공 후배들을 지들 이름도 못지어 다른 나라 이름 배껴먹고그거 은폐하는 놈들이라고 갈굽니다. -_-;;;) 이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붙었는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다만 B.C.E.107년에 현도군이 만들어지던 당시 지금의 집안 일대에 고구려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죠.고조선의 멸망 이후 설치된 한군현..
한번 소개한 그림에 대한 땜빵포스팅입니다.(이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덜 중요한 거지만)요즘 그것은 알기 싫다로 갑자기 200명은 넘게 들어오고800명이란 1주일치 방문자가 하루에 몰리기도 했습니다만여전히 이 블로그는 "변방의 북소리"니만큼비록 여러 차례에 걸쳐 천천히 간다, 일희일비 안한다고 말했지만생불이 아닌 이상 신경쓰이는 건 사실입니다.(물론 남들의 반의 반도 안쓴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땜빵 포스팅하나 날립니다. (실은 오후에 원고용 자료를 이어폰과 함께 집에 두고 나갔습니다. 캬캬캬) 골품제의 한 단면에서 소개한 그림의 원전입니다.의외로 많은 책에서 이 그림을 사용합니다.그말인즉 이 문제에 한해서 이보다 더 좋은 표는 없다는 겁니다. 어지간한 책에는 가장 오래된 출처가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
원문東川王 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해석동천왕은 또 동양(왕)이라 한다. 왕의 이름은 우위거, 어렸을 때 이름은 교체라고 한다. 산상왕의 아들로 모후는 주통촌 사람으로 (궁에) 들어가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그 집안의 성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전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지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었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왕이 사냥나가기를 기다려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갈기를 자르도록 하였다. 왕이 돌아와 말하기를 '말에게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다'고 하였다. 또 시중드는 자..
요즘 역사신문 만들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애들이나 선생님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데기존의 니들은 닥치고 들어~!(쉐릴 놈이 무대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던가)그런 수업보다 참여를 유도하는 수업이긴 합니다.뭐, 하루이틀 전에 나온 것도 아니고 아주 오래전부터 여기저기서 시도해오던 것이긴 합니다.다만 요즘은 이런 식으로 해도 될 만큼 여건이 충족된달까? 그냥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 아이들은 잘 따라옵니다.아무래도 글자보다 사진이나 영상이 익숙한 데다이때는 글자 위주의 매체가 어렵긴 합니다.문제는 4~6차 교육과정을 거치며 밑줄 쫙~, 별표, 큰 문단, 작은 문단..에 익숙한 어른들이 문젭니다.사실 적응 못하는 게 당연하기는 한데 아이들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해도저것을 만드는 과정..
고구려는 시기적으로 기원전 37년에 혼강유역의 환인지방에서 건국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광개토왕비에 적힌 왕대수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차이에 주목하며 200년 앞서서 건국했다는 것이 공식 견해입니다.또 중국기록에 고구려는 900년 된 나라라는 이야기도 나오지요.일부에서는 남한 학계는 식민사학 나부랭이라서 그딴 거 안믿는다고도 하지만(그에 대한 제 답변은 趙家之馬!입니다. 이놈의 19세는 욕도 잘해요~! 키랏!)아직 확실한 근거가 나오지 않은 상태라서 북한처럼 단정짓지는 않습니다.다만 북한처럼 완전한 고구려의 형태냐 원초적인 고구려적인 상태냐에 대해 조심스러울 뿐입니다.기원전 75년에 이 지역에 머물던 현도군이 만주로 이동하는데이를 고구려 국가형성의 중요한 분기로 보는 것이 공통된 견해입니다. 우선 본격적인 건..
원래 남들이 가라하면 안갑니다.항상 연방의 폭죽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이 블로그 처음 만들 적에 이렇게 하면 좋습니다, 저렇게 하면 좋습니다.. 이런 말 들려오면 허생 앞에서 츤츤거리는 이완대장마냥이건 아니므니다, 저것도 아니므니다.. 모드로 일관하였지요.그래놓고는 한다는 게 사람들이 그리 선호하지 않을 삼국사기 이야깁니다.관심가진 사람들과 살다보면 그게 단줄 아는데실제 리얼충의 세상에서는 ‘삼국사기에는 관심없다’가 6할, ‘김부식=큐베’가 3할그래도 재미있게 봐주는 사람이 1할..이게 냉정한 평가라고 봅니다. 그중에서도 이제 지증왕 두 편을 제끼고 동천왕을 건드렸는데(사실 한 편은 박사논문 하나 읽어야 하는데 그거 읽다가 피토하면 누가 살려주나여)머리 속에 대략 얼개는 그려지지만 그래도 자료는 확실히 ..
원문二十二年 ……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해석22년 ……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묻고 동천왕이라 이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에 있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장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왕(중천왕)이 예가 아니라고 금하려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능에 이르러 죽는 자가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다. 서기 248년에 동천왕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신하들이 따라 죽으려고 하였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중천왕은 뜯어말려야 했습니다만, 왕을 ..